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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벗아!

요즘 저는 월요일마다 옛글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관련 내용인 월인석보도 읽고,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도 읽고, 최초의 한글 성경(1887년) 중에서 마태복음도 읽고 있습니다. 시대와 종교를 넘어 공부하기에 기쁨이 큽니다. 특히 책에서 모르는 말이 나오거나 독특한 표현이나 쓰임이 나오는 경우에는 기쁨이 배가 됩니다. 공부가 점점 재미있는 이유일 겁니다. 모르는 기쁨이 호기심을 통해 아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최근에 최초의 한글 성경의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께서 자신을 판 유다를 부르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를 잡아갈 사람에게 그가 예수임을 알리기 위해서 입맞춤을 한 유다를 예수는 ‘벗’이라고 부릅니다. ‘벗아!’(마태복음 제26장) 하고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를 벗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른 복음에는 혹시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학자는 이 장면에서 유다를 벗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도 알고 싶어집니다. 공부하다 보면 궁금한 것 천지입니다.
 
벗이라는 말은 친구라는 말과는 달리 더 정이 갑니다. 아무에게나 벗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요즘 자주 쓰는 친구라는 말은 이미 타락을 해서 ‘이 친구, 저 친구’라는 말은 때로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는 말을 하대하는 장면에서 사용하니, 친구가 진짜로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벗이라는 말은 쓰임 자체가 드물어졌습니다. 내 벗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벗이여!’하고 부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허나 벗은 여전히 가슴 찡한 따뜻함입니다.
 
저는 요즘 아침에 연구실에 오면 제일 먼저 사전을 봅니다. 정확히는 두 권의 사전을 봅니다. 1942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어사전(문세영)’의 수정 증보판과 1975년에 나온 ‘새 우리말 큰 사전(신기철, 신용철)’에서 동일한 항목을 찾아봅니다. 시대의 변화를 언어에서 몸소, 오롯이 느끼는 기분 좋은 과정입니다. 아침마다 말의 기쁜 세례를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최근에 찾았던 ‘보람, 곱다, 사랑, 화’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시대의 간격만큼 사고의 틈도 벌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두 사전에서 벗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조선어사전에서는 두 번째 항목에 ‘숯불을 피울 때에 불씨에서 불이 옮기어 닿는 숯’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설명을 보면서 벗은 가까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같은 사회적 처지’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연히 다른 처지임에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말이나 친구처럼 대한다는 말은 모두 가족과 친구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 친구’라고 하는 말이 기분 나빴을 겁니다.  
 
벗을 한자로 하면 붕(朋)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에 나오는 말이지요. 붕은 같은 몸이 두 개 있는 모습의 글자입니다. 내가 또 하나 있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해 줄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을 겁니다. ‘벗이 있어 멀리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해석입니다. 이 말에서 가장 핵심은 ‘벗이 있다’는 겁니다. 벗이 없다면 이런 표현은 성립이 안 됩니다. 비슷한 처지에 가깝게 지내던 벗이 멀리서부터 나를 만나러 찾아와 주었다면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즐거움은 기쁨과 달리 함께하여야 더 커지는 감정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판 유다를 벗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말을 들은 유다는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벗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해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곧 후회하고, 판 돈을 모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비참한 결말입니다. 저는 종종 유다에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예수께 벗이라는 말을 들은 유다의 후회입니다. 벗은 참 좋은 말입니다. 제 글을 기쁘게 읽는 글 벗이 보고 싶네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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