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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읽는 세상] 힐데가르트 폰 빙엔

12세기 독일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라는 수녀가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여성 식물학자, 최초의 여류 작가, 최초의 인권주의자, 최초의 여성 작곡가 등 여러 분야에서 ‘최초’를 기록한 위대한 여성으로 꼽힌다. 그녀는 뛰어난 예지력과 지칠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수녀이자 뛰어난 예술가, 작가, 카운셀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인권운동가, 예언자, 작곡가였다.   베네딕트회 규율에 따라서 수도사들은 하루 여덟 번의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렸다. 성무일도란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말한다. 힐데가르트가 수도원에서 수녀 수업을 받고 있을 당시, 여자 수도원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었다. 하나는 밖을 향해 나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작은 성가대석을 향해 있었는데, 수녀들은 바로 이 창문 앞에 앉아 전례에 참석했다. 힐데가르트 역시 이 창문을 통해 말과 음악이 교차하는 성무일도를 들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힐데가르트는 음악성을 키웠다. 총명했던 그녀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다. 힐데가르트가 전례시와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42살 때부터였다. 성무일도를 위해 작곡한 그녀의 음악은 주로 성자들의 일생을 그린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것을 모아 ‘하늘의 계시에 의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중에 ‘성덕의 열’이라는 것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역할을 나누어 부르는 음악극인데, 가사와 곡이 모두 남아 있는 유일한 중세 음악으로 꼽힌다. 중세에도 물론 다양한 음악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중세라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성덕의 열’은 중세라는 암흑시대를 비추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여성 작곡가 중세 음악 여성 식물학자

2024-11-04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구이의 노래

카를 오르프의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는 중세 음유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 작품은 모두 24곡의 노래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에서 ‘왕년에 엄청 잘나갔던’ 인간을 백조에게 빗댄 노래가 있다. 노래는 백조가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리즈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난 옛날에 호수에서 살았어. 그때 정말 아름다웠지. 내가 백조였거든.” 테너가 소리 높여 노래하고 나면 남성 합창이 후렴을 받는다. “불쌍하구나. 불쌍해. 지금은 불에 까맣게 구워지고 있구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백조가 까맣게 불에 구워지고 있다고? 그렇다. 지금 백조는 호수에서 잡혀 와 바비큐가 되는 중이다. 왕년에 잘나갔으면 뭐하나. 지금은 장작불에서 통으로 구워지고 있는 것을. 그런 백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측은지심을 느낀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불쌍하구나. 불쌍해!”를 외친다.   백조는 불 위에서 서서히 죽어 간다. 한 절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간주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죽어 가는 새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시종이 나를 꼬챙이에 꿰서 돌리고 있네. 장작 위에서 까맣게 구워졌어. 이제 웨이터가 나를 내갈 준비를 하는구나.”   3절에서 백조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이제 접시 위에 누워 있다. 더 이상 날지도 못하고, 나를 먹어치울 이빨들만 바라보고 있구나.”   클래식 음악에는 백조를 묘사한 것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 음악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선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중세 음유시인이 그린 선술집의 백조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까맣게 타서 바비큐가 된 백조다. 카를 오르프는 이렇게 통구이가 된 백조를 코믹한 음악으로 묘사했다. 호수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을 때 누가 이런 최후를 상상했으랴. 우리의 젊음도, 우리의 화려한 시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그러니 우리 세월 앞에 겸손해지자.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구이 백조 구이 중세 음유시인들 클래식 음악

2024-07-29

[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동화 속 중세로의 시간 여행, 발틱 3국

발트해 남동쪽의 세 나라인 에스토니아(Estonia), 라트비아(Latvia), 리투아니아(Lithuania)는 우리에게 좀 낯설고 생소하게 다가오는 여행지다.   그러나 서쪽으로 폴란드, 동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발틱 3국은 여행 고수들이라면 일찌감치 점찍어 두고 버킷리스트에 올려둔 유럽의 숨은 보석이다. 굴곡 많은 외침의 역사 속에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수많은 침략과 지배를 당했던 세 나라는 1989년 8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브까지 2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평화와 독립의 노래를 부른 것. 이른바 '발트의 길'을 통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1991년 평화와 독립을 얻어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붉은 고깔 모양 지붕을 얹은 쌍둥이 탑, 이름하여 비루 게이트를 지나면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건축물들이 쉼 없이 이어진다. 구시가지는 저지대와 '톰페아'라 불리는 고지대로 나뉘는데, 톰페아에서 내려다보면 빙 두른 성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탈린이 가장 강성했던 15~16세기에는 이 성벽을 따라 46개의 성탑이 있었고, 이는 북유럽 최고의 철옹성 중 하나였다. 현재는 그중 26개의 성탑만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다른 도시와 구별되는 탈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휴양도시 파르누(Parnu)에는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여름 별장이 위치하며 축제가 끊이지 않아 여름이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말까지 생겼다.     라트비아의 리가 역시 구시가지 전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3세기 이후 한자동맹을 주도한 맹주답게 중세 건축물들이 훌륭하게 보존돼 있다. 표드르 대제 동상 자리에 설치한 자유의 여신상, 스웨덴 군인들이 화약 저장 목적으로 쌓은 화약탑, 고딕.더치 매너리즘.바로크 양식 등 각기 다른 스타일로 15~17세기에 걸쳐 지어진 삼형제 건물, 중세 시대 길드가 쓰던 화려한 건물인 검은 머리 전당 등이 유명하다.   리투아니아는 한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국가였다. 그중에서도 빌뉴스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리투아니아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현재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이자 중세와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매력적인 여행지로서 전 세계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인근에는 동화책에서나 나옴직한 아름다운 고성도 있다. 갈베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트라카이 성은 수 세기에 걸쳐 전쟁에 걸쳐 파괴되었다가 195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성은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지만 성 자체가 지닌 기품과 자태가 근사하다. 중세를 배경으로 풀어낸 여러 영화의 단골 촬영지여서인지 배를 타고 성 주변 호수를 누비다 보면 모두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박평식 / US아주투어 대표·동아대 겸임교수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동화 중세 중세 건축물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 여행자들

2024-05-09

[우리말 바루기] ‘햇사과’, ‘해팥’, ‘햅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햇사과·햇밤뿐 아니라 해팥·해콩 등 온갖 햇과일과 햇곡식이 쏟아져 나온다.   이처럼 ‘당해에 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로 ‘햇’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해팥’과 ‘해콩’에서와 같이 ‘햇’이 아니라 ‘해’가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둘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맞춤법 규정에 따르면 단어의 첫소리가 된소리(ㄲ, ㄸ, ㅃ, ㅆ, ㅉ)나 거센소리(ㅊ, ㅋ, ㅌ, ㅍ)로 날 경우엔 ‘햇-’이 아닌 ‘해-’를 쓰도록 돼 있다. 따라서 ‘사과’ ‘밤’ ‘과일’ ‘곡식’은 단어의 첫머리가 각각 ‘ㅅ’ ‘ㅂ’ ‘ㄱ’ 등으로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므로 ‘햇사과’ ‘햇밤’ ‘햇과일’ ‘햇곡식’ 등과 같이 ‘햇-’으로 적는 것이다.   반면에 ‘팥’과 ‘콩’의 경우엔 단어의 첫머리가 ‘ㅍ’과 ‘ㅋ’, 즉 거센소리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햇’이 아닌 ‘해’를 붙여 ‘해팥’ ‘해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 그해에 새로 나온 쌀은 뭐라고 해야 할까?  ‘해쌀’도, ‘햇살’도 모두 바른 표기가 아니다. 바른 표기는 ‘햅쌀’.   그 이유는 ‘쌀’의 어원에서 찾을 수 있다. ‘쌀’은 원래 중세 국어에서 단어의 첫머리에 ‘ㅂ’이 있던 단어다. 이 ‘ㅂ’이 음가를 갖기 때문에 ‘해쌀’이나 ‘햇쌀’이 아닌 ‘햅쌀’로 표기한다.우리말 바루기 햇사과 햅쌀 맞춤법 규정 중세 국어

2023-10-16

[기고] 북한의 괴이한 정치의식

김정일 생일 80주년 전날인 15일 북한 정권이 김정일 출생지라고 선전하는 삼지연에서 중앙보고대회가 열렸다(실제 출생지는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이런 의식은 이상한 나라 북한에서도 가장 이상한 행사 중 하나다.     공식 사진은 마치 초현실주의적 영화의 스틸컷 같다. 설산과 김정일 동상을 배경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고위 간부들이 연단에 앉아있고 멀찌감치 아래엔 군인과 주민들이 촘촘히 도열했다. 영하 15도의 추위 속에서 긴 연설을 들으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북한 사람들은 이런 괴이한 행사에 참석하는가.   물론 참석이 의무다. 거부하면 사상을 의심받아 처벌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사실 북한의 공식행사가 괴이해 보이는 건 그런 행사가 현대까지 살아남아서다. 여러 면에서 북한은 정치·사회적 화석이다. 조선 말기나 중국 왕조, 중세 유럽 사람이 더 잘 알아볼 것이다. 중세 교회의 의식이 신앙을 유지하고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했듯, 북한의 이런 행사도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 사상적 의도와 유리된 채 북한 주민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일례가 김일성·김정일 생일을 기념하는 주요 활동 중 하나인 김일성화·김정일화 전시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데 각 부서 간 경쟁이 치열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북한 간부들은 자기 부서의 전시를 자랑하고 다른 부서를 깎아내리느라 바빴다.   삼지연도 그런 예일 수 있다. 김정일이 출생했다는 귀틀집은 선전만큼 오래돼 보이지 않았고 굳이 오래돼 보이도록 노력한 흔적도 없었다. 안내원은 자신의 설명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멋진 털모자를 쓴 여군은 외국인 방문객들과 기념 촬영 전에 화장을 고치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중세 유럽의 순례지가 어느 정도 휴양지가 된 것처럼 삼지연도 일상의 노역에서 벗어나 쉬는 곳이 된 듯했다.   지난해 11월 칼럼에서 밝혔듯 북한 지도자가 당황할 정도로 믿음은 퇴색하고 있지만, 의식은 지켜지고 있다. 강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통과 습관이 되어서다. 북한에서 갓 결혼한 부부는 인근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는데 수령의 위대함을 되새기는지 알 수 없다. 서구에서 수년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적 없던 이들이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과 유사하다.   필자가 아는 북한 주민들은 정치행사에 참여하는 걸 고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겨 행사를 기다렸다. 기념일이면 적어도 하루를 쉬고(물론 연설을 들어야 하지만), 종종 추가로 식량·옷을 배급받았다.     연설·헌화 등 공식 일정이 끝나면 농구·탁구 등 체육대회가 열렸다. 때론 무도회도 있다. 의무였지만 주민들이 즐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면 여성들은 합성섬유로 만든 한복을 받고도 신나서 입었다.     필자의 대사관에서 일하던 젊은 북한 남성은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무도회를 기다렸다. 스텝이 꼬여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며칠 동안 연습하곤 했다.   견학이 포함되면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평양 밖으로 나갈 기회가 매우 귀해, 외국인 클럽에 근무하는 북한 직원들은 6·25 전쟁 사적지인 황해도 신천에 간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돌아온 후 미군의 학살 사건에 대해선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꽃구경한 이야기만 잔뜩 했다.   이번 15일 강추위 속에서 북한 고위직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몇몇은 김 위원장이 참석한 행사에 함께한 데다 사진도 찍혔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상당수는 설경에 감탄했을 수 있다.     정치행사에 익숙한 많은 이들은 몸만 거기 있을 뿐 삶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행사가 빨리 끝나 그나마 따뜻한 집이나 막사로 돌아가 뜨거운 차 한 잔 마시길 바랐을 것이다. 존 에버라드 /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기고 북한 정치의식 김정일 생일 김정일 동상 중세 교회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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