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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북한의 괴이한 정치의식

김정일 생일 80주년 전날인 15일 북한 정권이 김정일 출생지라고 선전하는 삼지연에서 중앙보고대회가 열렸다(실제 출생지는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이런 의식은 이상한 나라 북한에서도 가장 이상한 행사 중 하나다.  
 
공식 사진은 마치 초현실주의적 영화의 스틸컷 같다. 설산과 김정일 동상을 배경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고위 간부들이 연단에 앉아있고 멀찌감치 아래엔 군인과 주민들이 촘촘히 도열했다. 영하 15도의 추위 속에서 긴 연설을 들으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북한 사람들은 이런 괴이한 행사에 참석하는가.
 
물론 참석이 의무다. 거부하면 사상을 의심받아 처벌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사실 북한의 공식행사가 괴이해 보이는 건 그런 행사가 현대까지 살아남아서다. 여러 면에서 북한은 정치·사회적 화석이다. 조선 말기나 중국 왕조, 중세 유럽 사람이 더 잘 알아볼 것이다. 중세 교회의 의식이 신앙을 유지하고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했듯, 북한의 이런 행사도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 사상적 의도와 유리된 채 북한 주민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일례가 김일성·김정일 생일을 기념하는 주요 활동 중 하나인 김일성화·김정일화 전시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데 각 부서 간 경쟁이 치열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북한 간부들은 자기 부서의 전시를 자랑하고 다른 부서를 깎아내리느라 바빴다.
 
삼지연도 그런 예일 수 있다. 김정일이 출생했다는 귀틀집은 선전만큼 오래돼 보이지 않았고 굳이 오래돼 보이도록 노력한 흔적도 없었다. 안내원은 자신의 설명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멋진 털모자를 쓴 여군은 외국인 방문객들과 기념 촬영 전에 화장을 고치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중세 유럽의 순례지가 어느 정도 휴양지가 된 것처럼 삼지연도 일상의 노역에서 벗어나 쉬는 곳이 된 듯했다.
 
지난해 11월 칼럼에서 밝혔듯 북한 지도자가 당황할 정도로 믿음은 퇴색하고 있지만, 의식은 지켜지고 있다. 강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통과 습관이 되어서다. 북한에서 갓 결혼한 부부는 인근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는데 수령의 위대함을 되새기는지 알 수 없다. 서구에서 수년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적 없던 이들이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과 유사하다.
 
필자가 아는 북한 주민들은 정치행사에 참여하는 걸 고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겨 행사를 기다렸다. 기념일이면 적어도 하루를 쉬고(물론 연설을 들어야 하지만), 종종 추가로 식량·옷을 배급받았다.  
 
연설·헌화 등 공식 일정이 끝나면 농구·탁구 등 체육대회가 열렸다. 때론 무도회도 있다. 의무였지만 주민들이 즐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면 여성들은 합성섬유로 만든 한복을 받고도 신나서 입었다.  
 
필자의 대사관에서 일하던 젊은 북한 남성은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무도회를 기다렸다. 스텝이 꼬여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며칠 동안 연습하곤 했다.
 
견학이 포함되면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평양 밖으로 나갈 기회가 매우 귀해, 외국인 클럽에 근무하는 북한 직원들은 6·25 전쟁 사적지인 황해도 신천에 간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돌아온 후 미군의 학살 사건에 대해선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꽃구경한 이야기만 잔뜩 했다.
 
이번 15일 강추위 속에서 북한 고위직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몇몇은 김 위원장이 참석한 행사에 함께한 데다 사진도 찍혔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상당수는 설경에 감탄했을 수 있다.  
 
정치행사에 익숙한 많은 이들은 몸만 거기 있을 뿐 삶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행사가 빨리 끝나 그나마 따뜻한 집이나 막사로 돌아가 뜨거운 차 한 잔 마시길 바랐을 것이다.

존 에버라드 /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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