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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자화상

우연한 기회에 나 자신 밥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울속에 비친 나는 여태 생각한 내가 아니었다. 음식을 씹을 때마다 입 주위의 근육들이 모두 주름살이 되어 심하게 움직였으며 언제 생겼는지 두줄의 목줄기 또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를 어째! 아니 내가 맞아? 여태껏 나는 음식만큼은 교양있게 우아하게 먹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나는 거울을 가까이하고 본격적으로 음식 씹는 연습을 했다. 한참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는데도 원하는 모습이 나오질 않았다. 양쪽으로 내려오는 팔자 주름은 왜 저리 길단 말인가! 팔자 주름을 짧게 하려면 천상 입을 조금 벌려야 한다. 입을 벌리면 절대 안 된다는 관념으로 식사했는데 그것도 조금은 융통을 부려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거울에서 눈을 돌려 얼마 전 다니러 온 손자 웅이가 그려준 나의 초상화를 보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중학교 1학년 손자는 화지와 연필을 받고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 내 초상화를 완성했다. 손자 눈에는 내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보이는지 머리는 테두리만 표시했다. 얼굴은 나를 몇 번 쳐다보더니 명암을 넣어 입체감 있게 그렸다. 목선, 어깨선이  부드럽게 내려갔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의 모습이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손자를 꼭 안아주며 “할머니가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하고 물었더니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식탁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그림을 세워두고 매일 보고 있다.     그 초상화를 보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맞아, 웃는 표정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살짝 열고 양쪽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눈가에 주름은 지지만 팔자 주름이 짧아져서 훨씬 나아 보였다. 나는 일단 무엇을 먹든지 귀여운 손주들을 생각하며 웃음을 머금고 먹기로 결심을 했다. 가끔 잊곤 하지만 웃지 않는 노인의 표정은 무섭다고 한 어느 신부님의 얘기도 기억하며 노력하고 있다.     먹는 것뿐인가! 몇 년 전부터 나는 염색을 안 한다. 왜 그리 머리카락은 잘 자라는지 염색하고 2주만 되면 다투어 흰머리가 쏙 나온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대충 염색을 했지만, 무서운 전염병은 내 생각을 바꿔 놓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자고. 더구나 여기는 미국이고 온갖 색깔의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탈색까지 하여 흰머리 멋까지 부리지 않는가! 요즘은 흰머리라도 풍부하게 있어 줬으면 싶다. 그래서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를 사용한다. 어느 피부과 의사의 조언이라고 친구가 알려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감는다. 가끔은 게으름을 피우다 저녁 늦게 머리를 감고 말리려면 피곤한 일이지만 머리카락을 보존할 욕심으로 참고 견딘다.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가끔 “갈수록 산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의 ‘나이듦의 지혜’를 보면 나이 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그중에서 그는 노인들에게 고독과 친해져야 한다고도 했다. 고독이 노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하는데 친해져야 한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교회에서 홈리스 핫도그 빵을 준비하고 그냥 오기가 왠지 허전해서 젊은 사람들이 앉아 얘기하는 자리에 끼어 보았다. 그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데도 나는 자꾸 눈치가 보이고 낯선 곳에 온 느낌이 들었다.  자식들과도 그렇다. 전화도 길게 한다. 끊어야지 하면서도 끊지 못한다. 친구끼리 통화도 짧게가 안 된다.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도 쳐준다.       또 돈 문제도 그렇다. 노년에는 경제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요즘 우리 또래 한인들이 복수국적을 하느라 한국에 가는 것을 종종 본다. 한국에도 실버타운 바람이 불고 요양원료가 미국보다는 싸다고 한다. 미국에서 고임금을 받고 여태까지 직장을 다닌 친구도 더 늙어 요양원 가야 할 때는 한국으로 가겠다고 한다. 다행히 메디칼에 해당한 사람은 사정이 조금 다른 것으로 안다.   의복이나 신발도 편한 것만 찾는다. 부드러운 니트 바지를 즐겨 입게 되고 구두는 굽 없는 플랫으로, 평소에는 운동화를 주로 신는다.  이곳은 미국 사람 사이즈에 맞춘 옷이 대부분이라 나에게 맞는 바지 찾기가 쉽지 않다.  또 날마다 스트레칭을 해서 팔, 다리 ,허리, 목, 어깨를 펴주어야 한다. 요즘은 컴퓨터 시대다. 겨우 워드나 치고 이메일 정도는 하고 있지만 조금만 변화가 생겨도 겁이 난다.  이렇게 요즘 나의 변해가는 자화상을 다 늘어놓으려면 책 한권이 될지도 모른다.     외형이 변하니 마음까지 약해진다. 젊었을 때의 자신감은 다 어디로 가고 여행을 가도 젊은 자식들과 동행하면 든든하다.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이 떠오른다.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미워져서 갑니다. 되돌아와서  봅니다. 역시 밉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돌아와 순수했던 자신을 찾습니다.’ 시인처럼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거대한 꿈은 아니지만  내 비록 세월이 가서 젊은 나를 찾아볼 수 없어도 추억 속에 거침없었던 나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자화상 팔자 주름 모두 주름살 목선 어깨선

2023-10-12

[기고] 아, 잊으랴! 6월에 만난 슬픔을

누가 6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슬픈 옛날을 더듬으며 우거진 녹음 속에 숨을 죽이면서 피해 다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간다. 해마다 현충일엔 너댓명의 노병들이 죽은 전우의 이름 앞에 둘러앉아 그 치열했던 전장 속으로 빠져든다.  새파랗게 젊은 육군 소위들이 이름 모를 산야에서 적의 포탄 속을 헤매다 피투성이가 되어 고지에서 내려올 때 그래도 살아 있음을 감사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월의 증표인 백발마저 거의 다 빠진 나이 90이란 신분증에 이마의 주름살 계급장과 가슴에 단 낡은 훈장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죽은 전우 곁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음을 미안해하면서 통곡한다. 벌써 73년째, 6·25한국전쟁은 아직도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눈시울을 젖게 한다.       나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의 한 중학교(당시 6년제) 재학생이었다. 갑자기 터진 전쟁에 북한 인민군을 피해 남으로 향했다가 가족과 헤어졌다. 어디 나 혼자 뿐이랴. 갈 곳 없는 서울의 중학생들이 떼 지어 군번도 계급도 없이 무작정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전세가 호전됐을 때 국방부장관 명에 의해 나도 학교로 복귀했다. 하지만 어차피 입영할 몸, 졸업 무렵 다시 육군간부후보생 (OCS)에 지원해  6개월 만에 소정의 과정을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모 소위’란 소리를 들으면서 전방부대에 배치돼 치열한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직전의 전투 상황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휴전 후 1957년, 미국에서 얻은 엄청난 무상 군사원조 덕에 한국군은 항공기부터 해군함정, 그리고 지상군에 절대적 장비인 전차도 갖추게 되었다. 또 군사 교육 목적으로 초급장교들의 미국 유학도 많았다. 나도 그 중 한명으로 선발돼 영화나 뉴스로만 보고 듣던 미국 땅을 밟아보는 행운을 1년간 누렸다.     뉴저지에서 유학 중이던 6월 어느 주말 오전, 시내 관광에 나서려는데 숙소 앞에 젊은 부인이 어린 자녀 2명을 차에 태운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모닝” 하고 인사하며 지나가려는데 그 부인은 “웰컴어보드” 하며 차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그 차를 타고 말았다. 그 부인은 나를 본인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갔다. 처음으로 미국교회에 출석해 예배드렸고 부인 집에 초대되어 점심 대접도 받았다. 그날 관광 계획은 당연히 포기했다.   부인은 쌀밥에 채소를 버무려 김치처럼 만든 샐러드와 푸짐한 프라이드치킨, 커피와 아이스크림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부인의 7세 아들, 5세 딸과 함께 식사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미군 정복을 입고 육군 상사 계급장을 단 건장한 남성 사진을 발견했다. 부인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랑하는 남편이고 애들의 아빠”라고 소개했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냐고 되물었더니 그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남편은 한국전쟁 휴전 한 달 전에 한국전에서 전사했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순간 나는 “오 마이 갓”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그 부인은 이어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분명 남편이 그나라를  도와줬다는게  감사한 일이죠” 하면서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선하신 하나님, 어쩌면 저렇게 마음씨 착하고 어린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에 슬픔을 주십니까?” 나는 신앙심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했다. 전쟁의 유물은 과부와 고아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하나님, 이 잔인한 6월에 저토록 큰 슬픔일랑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슬픔 한국전쟁 휴전 육군 소위들 주름살 계급장

2023-05-31

[이 아침에] 마음의 주름살을 펴는 법

“얘!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스크 좀 벗어봐.” “마스크는 왜? 안 돼.” “안 되긴 왜 안 되는데, 잠깐만 벗어봐 예쁜 얼굴 좀 보자.” “예쁘긴 뭐가 예뻐, 다 늙어빠졌는데.” “그래도 너는 나보다 젊잖니.” “젊으면 뭐 주름살이 피해 가나, 얼굴이 자글자글한 데.”     90세 된 선배 언니가 80대 중반을 지나는 후배에게 마스크를 벗으란다. 주름살 보이기 싫어 못 벗겠다는 후배는 선배의 집요한 설득과 강요에 결국 마스크를 벗으면서 말했다. “봐 주름 많잖아.”     주름살 실랑이를 옆에서 듣는데 불똥이 나에게 튈 것 같았다. 얼른 자리를 피하는 데 아니나 다를까 후배는 고개를 돌리면서 나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목사님! 나 주름 많죠?” 있는 주름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나이 들면 주름이 다 생긴다고 해봐야 정답은 아닐 것 같아 그냥 못 들은 체하고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나의 몸은 이미 반쯤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도외시되었지만,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후배는 도망칠 곳도 없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얘! 나 주름 많지?” 무슨 답이 나올지 자못 궁금해 내빼던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기습 질문을 받은 후배의 난처해 하는 마음이 몇 발짝 떨어진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일찍 빠져나오길 잘했지’ 하면서 답을 기다리는데 ‘그놈의 주름살이 뭐길래’라는 생각 때문에 머릿속에 주름이 잡혔다.   사실 주름살 좀 있다고 그리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주름살이 인생의 품위와 경륜이라고, 웃음과 울음이 빚어낸 삶의 흔적이요 세월이 만든 작품이라고 말한들 주름살을 반가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얼굴에만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주름살은 또 어쩔 것인가? 인생길에 마주치는 좌절과 실패가 상처가 되어 마음에 주름 한 줄을 더 새겼고, 오해와 편견이 또 하나의 깊은 주름살을 마음에 수놓았다. 이민 생활의 갑갑함이 스트레스가 되어 마음의 잔주름을 그었고, 사고와 재해, 갈등과 다툼을 겪을 때마다 짙은 주름살이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주름을 싫어했다. 손빨래한 옷감을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겨 주름을 폈다. 숯을 올린 조그만 쇳덩이가 옷감 사이로 휘젓고 다닐 때면 아무리 심하게 구겨졌던 옷이라도 반듯하게 펴졌다. 우리 조상들은 없는 살림에도 옷과 이불 홑청의 주름을 펴면서 삶의 주름도 함께 펴지기를 바랐다.   얼굴의 주름살은 수술로 펴고, 구겨진 옷감은 다듬이질로 펼 수 있다면 마음의 주름살은 어떻게 펼 것인가? 이민 생활이라는 다듬잇돌 위에 위태롭게 선 인생에 고난이라는 방망이가 사정없이 내리칠 때가 있다. 아프지만, 참다 보면 그 방망이질이야말로 인생의 주름을 펴는 흥겨운 가락이 된다. 세월이 아로새긴 마음속 주름살이 고난의 다듬이질로 펴질 때쯤이면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더 잘 알게 된다. 철이 드는 게다.   ‘얘! 나 주름 많지?’ 아까 주름살 실랑이에서 선배의 난처한 질문을 받은 후배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눈이 안 좋아서 잘 안 보여.” 그렇다, 얼굴이나 마음에 새겨진 주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름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이 문제였다. 주름살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적당히 눈감고 살다 보면 마음의 주름살도 넌지시 펴질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주름살 마음 마음속 주름살 주름살 실랑이 사실 주름살

2023-05-03

[문화산책] 정신의 주름살, 영혼의 곰팡내

“노년이 되면 얼굴보다 정신에 더 많은 주름살이 생긴다. 늙으면서 곰팡내 나지 않는 영혼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늙어감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글이다.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몽테뉴의 격언이다. 영원한 고전 ‘에세(수상록)’를 통해 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분의 말씀이니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정신의 주름살, 영혼의 곰팡내 같은 절묘한 표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의 꼴새를 되돌아보고 깊은 부끄러움에 잠기게 된다. 나도 이 말씀에 공감하여 “그러니까 마음주름살이 생기지 않도록 평소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런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주름살은 겁부터 내고 피하기만 할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인생 연륜의 훈장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가 아름답듯 주름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 그러니까, 주름살을 없애려고 무리하게 애쓰기보다는 보기 좋고 멋지게 주름지는 편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할 것이라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주름살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안(童顔)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고, 순리에 맞게 나이에 걸맞는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이야기, 그렇게 늙었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실제로 그런 주름살을 가진 이들이 있다. 부럽다.   정신이나 마음에 주름살이 생기는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나 화병 등일 것이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게 돌아가도 화를 내지 말고 웃으며 긍정적으로 살면, 사랑으로 베풀고 남을 도와주며 살면, 마음이 마구 꾸겨질 일도 없다는 식의 해답이 나온다. 아주 간단한 것 같은데 실제로 실천하기는 무척 힘든 해답이다.   영혼의 곰팡내를 다른 말로 하면 꼰대 냄새다. 늙었느냐 낡았느냐, 발효냐 부패냐의 차이를 말해주는 냄새, 본인은 전혀 못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약한 냄새….   그런 고약한 냄새를 없애고 잔주름살을 없애려면 마음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마음은 우리 몸에서 가장 강력한 근육 중 하나이고, 마음의 근육이 튼튼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한다. “행복이란 건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행복도 훈련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이 권하는 마음근육 키우기 방법은 다양하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정서적 균형 상태 유지하기, 부정적 생각 떨쳐버리기, 친절이나 자비 같은 정신적 습관 만들기, 감사하는 마음과 유머를 통해 회복탄력성 키우기, 일상에서 즐거움 훈련하기 등등 참으로 많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감정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말은 훌륭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얼핏 드는 내 생각에는, 자연과 어우러지기, 책 읽기나 음악 듣기, 미술 감상 같은 예술 즐기기 등이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 아주 조금이라도 멋진 늙은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마음과 정신을 튼튼하게 하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내가 하는 예술, 창작활동에 필요한 순발력과 지구력, 창의력과 포용력 등이 모두 튼튼한 마음근육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심은 잘도 하는데, 번번이 마음뿐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주름살 곰팡내 주름살 영혼 정신적 습관 부정적 생각

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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