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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제국 꿈꾸는 한인 셰프…'먹바' 운영 2세 에스더 최

뉴욕의 유명 관광지로, 맛집들만 모였다는 첼시마켓에서 최초로 자리 잡은 한식당이 있다. 바로 한인 2세 에스더 최(38.사진)씨가 운영하는  '먹바(Mokbar)'다.     온라인 매체 ‘헐머니(HerMoney)’는 오픈한 식당 5곳 중 4곳이 문을 닫는 냉혹한 요식업계에서 여성 셰프이자 오너로 성공한 최씨가 ‘한식 제국(Korean Food Empire)’을 건설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한식 스낵바를 컨셉으로 하는 라면 전문점인 먹바는 규모는 작지만 늘 손님으로 북적이는 첼시마켓의 인기 식당 중 하나다.     먹바의 메뉴들은 자칫 뻔할 수 있는 한식에 최씨의 독창성이 더해져 있다.     라면에 비빔밥 재료를 토핑으로 얹은 ‘먹바 클래식’은 베스트셀러이고 호떡에 다진 땅콩과 간 양념 삼겹살을 넣고 고추장 소스를 더한 ‘호 케이크’, 고추장 아이올리와 김치, 파, 후리카케를 얹은 ‘K타운 프라이’ 등도 인기 메뉴다.     최씨는 “익숙한 한식에 색다른 재료와 맛을 가미해 한식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첼시마켓에서 한식의 인기를 입증한 먹바는 현재 브루클린과 미드타운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으며 조만간 뉴저지와 라스베이거스에 새로운 지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규모가 커진 지금과 달리 처음에 최씨는 마이너스 통장을 들고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몇 달 동안 치열한 경쟁과 수많은 시식, 사업계획서 작성 끝에 입찰에 당첨됐다”며 “통장에 마이너스 100달러뿐이라 부모님께 소액 대출을 받았는데 몇 주 만에 다 갚았다”고 말했다.     뉴욕의 대표적인 요리학교 ICE를 졸업한 최씨는 먹바를 열기 전 멕시코 음식점 ‘라에스키나 (La Esquina)’, 레바논 음식점 ‘일릴리(ilili)’ 등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한식의 대중화를 꿈꿨다.     당시 남성 셰프가 전부였던 주방에서 홀로 여성으로 일했지만, 항상 낮은 자세로 배움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한인으로서 언젠가 뿌리로 돌아갈 것이지만 다른 나라의 요리를 배우는 것은 기뻤다”며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뉴저지 남부에서 태어난 최씨는 처음에 부모님의 바람대로 약학 대학을 진학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요리사 꿈으로 전향했을 때 모든 집안 식구들이 반대했다고 전했다.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쓴 최씨의 결정 뒤에는 그녀의 할머니가 있었다.     최씨는 “조부모님과 함께 크며 할머니의 요리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한식은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먹바는 곧 4개의 지점이 추가될 예정이다.   최씨는 “먹바의 성공은 한식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마침내 한식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먹바 웹사이트:www.Mokbar.com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에스더 한식 한식 제국 한인 셰프 한식 스낵바

2023-12-29

정조를 버리고 제국을 지켜낸 효장문황후

정조를 버리고 제국을 지켜낸 효장문황후   김건흡 MDC 시니어센터 회원    효장문황후는 청나라 2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비(妃)이며, 3대 순치제의 모후다. 그녀는 청나라 초기의 네 왕조를 경험했고, 그 가운데 두 명의 어린 황제를 보필했다. 대청제국 초기의 치열하고 참혹한 권력투쟁 속에서 효장문황후는 중대한 고비마다 기민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제국을 단결과 발전의 길로 이끌었다. 만주족 최고의 미녀'란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여인이자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였던 효장문황후는 제국의 권력이 빛바랜 순간 자신만의 위엄으로 제국을 지켜낸 수호자였다. 75세의 생애 동안 여섯 살 아들 순치제가 황제가 되고 여덟 살 손자 강희제가 뒤를 이을 때마다 이들의 최고 수호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효장문황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간 여인이다. 하늘은 그녀에게 봉건시대의 여인답지 않은 재능과 포부를 안겨줬다. 그리고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운명도 함께 부여했다. 이토록 영웅적인 인생의 대가로 그녀는 여성으로서 정조를 버렸다는 후손들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유교적 가치를 중시했던 중국에서 그녀는 황후의 신분을 갖고 두 남자의 아내가 되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든든한 보살핌을 받은 황제들은 제위를 굳건히 한 후 나라의 강토를 만주에서 중국 대륙, 서역으로 넓혀나갔다. 효장의 남편 홍타이지는 우리 한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인물이다. 1636년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 태종이다. 다음해인 1637년, 효장은 아들 복림을 출산했다. 그러나 1643년, 홍타이지가 뇌출혈로 급서했다. 갑작스런 죽음이어서 후사에 대한 한마디 언질도 남기지 못했다. 효장과 복림의 인생은 이때부터 급격히 물줄기를 틀게 된다. 후계를 놓고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황숙 도르곤과 홍타이지의 장자 호격이 정면 대립했다. 다른 황숙 황자들까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들은 모두 최정예 팔기군을 나눠 거느리고 있다. 실력으로 후계를 뽑는다면 엄청난 살육이 불가피했다.   이 때, 만주족 특유의 의정제도가 놀라운 정치적 해결을 이끌어냈다. 의정회의에서 결정된 후계 황제는 뜻밖에도 효장의 아들 복림이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 된 복림이다. 어린 꼬마가 놀랍도록 총명해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다. 도르곤도, 호격도 상대가 즉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도출된 고육책이었다. 청나라 황실은 17년 전에도 비슷한 파동을 겪었다. 홍타이지가 즉위할 때다. 개국 황제인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전투 도중 부상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유언을 문서로 남기지 못해 병석을 지킨 아들 홍타이지에게 몇 마디만을 전했다고 한다. 누르하치가 죽은 후, 홍타이지가 전한 유언은 모든 사람의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오랍나랍씨를 순장하라.’   누르하치가 가장 아끼던 여인이다. 도르곤의 생모이기도 하다. 이 여인을 너무나 사랑해 그녀 소생 세 아들도 누르하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12황자 아지거, 14황자 도르곤, 15황자 도도는 한 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한때는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셋 가운데 하나일 것이란 소문도 무성했다. 뜻밖에도 새 황제가 된 홍타이지가 누르하치 못지않게 도르곤을 아꼈다. 차곡차곡 군 경력을 쌓아 도르곤이 아시아 최고의 명장으로 성장하도록 온갖 후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자신은 황제가 되고 저 어린 것들은 엄마도 잃은 것이 불쌍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죽여서 후환을 없애버리기엔 도르곤이 너무나 아까운 인재임을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홍타이지 없는 세상에서 도르곤은 최고 실력자가 됐다. 그의 눈에 홍타이지의 여인 효장이 들어왔다. 미모도 출중하지만 정국을 보는 데 있어서 비범한 재능을 가진 매우 걸출한 여인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여인 효장을 차지했다. 도르곤과 효장  사이에 누가 먼저 복림을 황제로 만드는 협력을 제안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당시의 상식에 비추어 도르곤이 먼저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황궁에서 당장의 목숨도 보장하기 힘든 어린 아들이 황제가 된다니, 효장으로서는, 한 어미로서, 절대 물리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 대신, 효장은 이제 정조를 버려야 한다.   효장이 새 남편 도르곤의 여인이 된지 7년. 복림이 장성해 친정을 하기 시작했다. 섭정 권력을 내놓은 도르곤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곧 이어 도르곤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어머니의 수치가 복림의 원한으로 이어진 양상이었다. 도르곤은 사후에 성종 의황제로까지 추존됐지만 곧 이은 격하 움직임으로 시신을 훼손하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여인의 자존심을 내던지고 황제로 만든 아들이 순치제 복림이다. 순치제는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외면하듯 스물세 살 나이에 세상을 버린다. 일설에는 애인의 죽음을 슬퍼해 여덟살 아들 현엽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스님이 됐다고 한다. 효장은 엄마 고생 몰라주는 아들을 슬퍼할 겨를도 없게 됐다. 이제 혼신을 기울여 손자 현엽(강희제)을 지켜야 했다. 현엽을 둘러싼 조정에는 호랑이 같은 권신들이 보정대신의 탈을 쓰고 제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4대 황제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순탄한 적 없는 권력이양 과정을 겪었다. 어린 아이를 보위에 두고 벌이는 군신들의 승냥이 같은 속마음은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듯 훤한 효장이다. 만약 효장이 강희27년까지 76세의 장수를 누리지 않았다면 중국 역사상 최고의 60년 태평성대를 이끈 강희제 치세는 일찌감치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미약했던 황권을 굳건히 하고 오삼계 등 삼번의 난도 평정한 강희제가 30대 장년으로 성장한 어느 날 효장은 유언을 남겼다. “마땅히 태종 폐하 계신 곳에 가야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소란 떨기 미안하구나. 우리 손자 있을 곳에 나도 함께 묻어주면 좋겠다.”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만주에 묻힌 태종의 능묘에 합장하지 말고 황실의 묘역으로 새로 조성한 준화에 묻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너무 멀어서,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서 남편 찾아가기 미안하다는 것만이 그녀의 본심은 아니었을 듯하다.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를 두고 떠나버린 아들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살아온 날들의 허탈함에 그저 번거로움을 떨쳐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효장문황후는 평생 3대의 황제를 지켰으며 특히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온 여인으로서 후세인들은 그녀를 ‘청나라의 국모’라 부르기도 한다.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묵묵히 무명공신의 역할을 담당해 역사적 위인으로 불리는 그녀, 오늘에도 중국인들은 그녀의 선량함과 영명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요즘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 부인의 화려한 옷과 장신구 이야기로 시끄럽다. 최근 한 시민단체는 의상 구입과 관련 김정숙 여사를 경찰에 고발했다. 대통령 부인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는 못할망정 ‘옷사치’ 때문에 ‘김멜다’라고 조롱 받는 모습이 민망하다. 그녀의 옷값 논란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영부인의 옷차림도 외교이고 국격”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소위 ‘패션 외교’는 여성이 외모로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더구나 지금은 3년째 코로나 팬데믹에 우크라이나전쟁까지 겹쳐 세계가 원자재와 식량 부족으로 신음하는 때다. 여성의 본분은 일하는 남편의 곁을 꽃처럼 장식하는 것인가. 남편의 지위로 얻은 재물로 치장하는 게 무슨 본보기라도 되나. 국격을 옷으로 높이나. 너무도 비현실적인 일화들이 전해질 때마다 청와대 저 깊은 속에선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의아할 뿐이다. 왜 청와대를 탈출하려고 하는지, 문재인의 청와대가 말해주고 있다.         김지민 기자효장문황후 제국 황제 태종 후계 황제 대청제국 초기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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