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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 사이의 벽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흥미롭게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무라카미의 전작들에 비해 그다지 돋보이는 작품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폭넓은 세계관과 자유로운 상상력, 끈질긴 신념 등은 매우 부러웠다.   이 소설의 주요 얼개는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 사이의 벽과 양쪽 세상을 오가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가 오랫동안 가져온 우주관을 집약한 상징적 설정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 세워져 있는 불확실하지만 완고한 벽의 존재와 그 벽을 넘어 진짜 나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은 40여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했던 중편소설을 장편으로 다시 쓴 것이다.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기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발표한 글은 거의 모두 책으로 공식 출간되었다. 휴지에 끄적거린 낙서마저도 책으로 출간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작품은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오랜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30대 청년 시절에 그렸던 세계를 줄곧 마음에 품고 있다가 40년이 지난 70대에 이르러 마침내 새로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2020년부터 3년간의 집필 끝에 장편소설로 완성했다고 한다. 존경스러운 집념이다.   “어쨌거나 이 작품을 이렇게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 쓸 수 있어서(혹은 완성할 수 있어서) 솔직히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나에게 이 작품은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였으므로. (…) 그것은 역시 나에게(나라는 작가에게, 나라는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가시였다. 사십 년 만에 새로 쓰면서 다시 한번 ‘그 도시’에 돌아가 보고, 그 사실을 새삼 통감했다.” 작가 후기의 한 구절이다.   4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작가 무라카미의 작가적 집념과 끈기가 부럽다. 배우고 싶다. 이런 믿음과 끈기 없이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무라카미는“이 작품에는 무언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느껴왔다.”고 고백했다. 사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시 고쳐 쓰고 싶은 작품, 고치고 또 다듬어도 아쉬운 작품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시 쓸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더구나 40년이나 지나서….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줄곧 ‘디아스포라의 숙명’ 같은 것을 떠올렸다. 내 멋대로의 해석이고 엉뚱한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의 삶을 저쪽 세상, 이민 후의 타향살이를 이쪽 세상으로 상정하고 읽으니 참으로 많은 것이 선명해지고 이런저런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새로운 상상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한다.   영화 ‘전생(Past Lives)’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는 셀린 송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12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그는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시기도 일종의 전생이라고 생각한다. (이민자로서) 어디에 무엇을 두고 오면 그것을 전생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민을 그렇게 해석하다니, 신선하기도 하고 공감도 가는 말이다.   전생과 현생을 이어주는 인연…. 이 짧은 말 안에 이른바 ‘디아스포라 예술’의 중요한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무라카미 소설에 빗대자면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인 셈이다. 두 세상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근본적 숙제…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명언이 떠오른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이쪽 저쪽 저쪽 세상인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소설

2024-01-18

[필향만리] 未之能行 唯恐有聞 (미지능행 유공유문)

공자 제자 자로는 “배우고서도 아직 실천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가르침을 또 들을까 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더러 지나치게 과감하여 스승으로부터 지적을 당하곤 한 자로였으니 실천력도 남달리 강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의식주에 소용되는 물건도 그렇지만 지혜로운 삶에 필요한 ‘말씀’도 실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 말, 한 가지 진리라도 제대로 터득하여 ‘남의 말’로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실천하는 삶이라야 알차고 행복하다. 좋은 말씀과 유익한 정보를 많이 듣겠다며 이곳저곳 허덕이듯이 돌아다니는 삶은 오히려 불행하다. 그래서 독일 시인 칼 부세(1782~1928)는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기에 남의 말을 믿고서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라고 읊었다.   잡다한 ‘검색’으로 허겁지겁 때우며 사는 삶이 아니라, 진지하게 ‘사색’하며 착실하게 실천하는 삶이라야 아름답다. 사색도 실천도 없이 챗봇의 생성만 기다리는 삶은 삭막하고 무의미하다. ‘지식을 검색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채 실천 없이 거푸 배우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한 자로의 시대가 부럽다. 김병기 /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필향만리 유공유문 사색도 실천도 공자 제자 너머 저쪽

2023-12-10

[살며 생각하며] 사순절에 떠나는 천로역정 3

지난 회에 이어 천로역정의 나머지 이야기다.   ‘아름다운 궁전’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주인공 크리스천을 기다린 곳은 ‘겸손의 골짜기’였다. 여기서 ‘아블루온’이란 악룡에게 무시무시한 불화살의 공격을 받아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고 이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함정, 올가미, 귀신, 괴물들을 만나지만 주의 권능에 힘입어 용케 피한다. 그런 뒤 광야 저쪽 야트막한 언덕에서 앞서 걸어가던 ‘신실’이란 친구를 만나 같이 걸으며 염려, 고통, 여러 유형의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광야를 거의 다 지날 무렵 순례 초기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던 ‘전도자’를 만나 고난의 순간들을 하소연하지만 전도자는 오히려 “아무런 고통 없이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제 광야를 벗어나면 원수들이 죽일 작정을 하고 덤벼들 테고 그렇게 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믿음의 피’를 입증해 보여야 한다”는 무서운 예언을 남긴 채 떠난다.   전도자와 헤어진 두 사람은 이제 광야 끝자락에 위치한 ‘허영의 도시’ 에 이른다. 이 도시는 수천 년 전부터 집, 토지, 지위, 명예, 진주, 보석 같은 허영물을 전시하고 순례자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허영 명품에 조금의 관심조차 기울임 없이 갈 길만 재촉하자 상인들은 ‘입은 모양새나 말씨가 전혀 다르다’며 시비를 걸어 싸움을 유발한 뒤 관가로 끌고 가 ‘폭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겼다. 결국 ‘신실’은 사형 언도와 함께 죽임을 당하고 크리스천만 살아 홀로 걷다 ‘소망’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탐욕, 구두쇠, 돈, 데마에 이어 ‘소금기둥이 된롯의 아내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뒤 그림처럼 아름다운 ‘생명수강’ 도착, 모처럼 긴 휴식을 취한다. 그런 뒤 길을 잘못 들어 ‘절망의 거인성’에서 ‘의심의 감옥’에 갇혀 자살을 종용받지만 품속에 있던 ‘약속의 열쇠’로 감옥 문을 열고 나와 ‘기쁨의 산’에 이르게 된다.   이 산에서 두 사람은 지식, 경험, 경계, 성실 같은 네 목자로부터 풍부한 영적 지식과 경계의 교훈을 얻지만 ‘미혹의 땅’에서 ‘무지’를 만나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또 ‘마법의 땅’에서는 미혹에 빠져 잠시 영적으로 혼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담대히 모든 유혹과 혼란을 극복한 뒤 순례길 마지막 안식처 ‘뿔라의 땅’에 입성, ‘주의 신부’ 된 기쁨과 함께 ‘주의 만찬’에 초대되어 떡과 잔을 나눈다. 그리고 저 멀리눈 앞에 펼쳐진시온의 언덕을 바라보며 새 힘을 받아 성문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죽음의 강’조차 가뿐히 건넌다. 그리고 빛나는 영들(천사)의 환영 속에 당당히 천성에 입성하는 것으로 천로역정의 대단원은 막을 내린다.   2000년 전 예수는 죽임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예루살렘에 입성, 어제 ‘성금요일’ 밤 십자가 처형을 당했고 오늘 유대교 안식날, 실패자의 모습으로 무덤에 갇혀 지냈다. 그리고 3일만인 내일 죽음을 이긴 승리자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사실 천국은 ‘크리스천’ 같이 고난을 통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의 공로로 가는 곳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작가 존 번연은 천로역정을 통해 좁은 문이나 십자가보다는 ‘허례와 위선’ 같이 넓고 평탄한 길만 탐하는 오늘날 우리 신앙 자세를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천로역정 사순절 주인공 크리스천 광야 끝자락 광야 저쪽

20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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