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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네트워크] 어떤 유언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2학년 때다. 미술 시간,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님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칭찬이 돌아왔다. 그가 그린 건 고향 아키타(秋田)현의 단풍이 곱게 든 산. 자이니치(在日·재일동포)로 차별과 가난에 움츠러들었던 어린 하정웅의 마음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마냥 그림이 좋았다. 그림 속에선 차별도 서러움도 없었지만, 가난만은 이기질 못했다. 밑으로 동생 셋이 있던 그에겐 장남 자리는 무거웠다. 고교 졸업을 하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회가 대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에 사회에서 졸업증을 받으면 되지 않나.’ 하지만 구직조차 쉽지 않았다. 자이니치였던 탓이었다. 절망의 시간이었다.   그러던 그를 하늘이 도왔다. 26살 때다. 전자제품을 팔았는데, 도쿄 올림픽(1964년)이 열렸다. 불티나듯 물건이 나갔다. 이를 밑천 삼아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운 좋게 개발 붐이 일면서 사업은 쑥쑥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에 살던 화가 허훈이 찾아왔다. ‘그림을 팔아달라’는 얘기였다. 풍경화 ‘금강산(1961년)’ 이었다. 가본 적 없는 조국의 풍경에 마음을 뺏겼다. 작가가 자이니치란 이유로 그림 중개는 쉽지 않았다. 이 일로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작가들의 그림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자이니치 작가들의 그림을 알리고 싶었다. 모국에 제대로 된 미술관이 없다는 걸 알고는 광주시립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 등에 하나둘 기증하기 시작했고, 재일 작가들의 작품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 8일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하정웅 콜렉션’ 전시회에서 만난 그는 올해 84세. 서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바꾼 그림 앞에선 시간을 잊었다. 지난 55년간 한·일 양국에 그가 기증한 그림은 모두 1만2000여 점. 정작 그는 “세어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사실 많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돈만으론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난 빈손이지만, 기증하면 우리 모두의 보물이 될 수 있잖아요.” 목소리가 맑았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아픈 굴곡의 시간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자이니치로 살아온 그는 이번 전시회가 자신의 ‘유언’이라고 했다. 30대 젊은 한·일 작가 두 명의 작품을 소개하며 그가 정한 주제는 끼리끼리. “서로 손잡고 사이좋게, 행복하게, 같은 길을 보며 걸어나가자”는, 젊은이들과 미래에 보내는 메시지란다. 엄동설한 한·일 관계를 풀자는 소리가 봄 새순처럼 곳곳에서 솟아나고 있다. 고국의 젊은이들, 그리고 일본의 청년들에게도 그의 이런 간절한 바람이 닿기를 바란다. 김현예 / 도쿄 특파원J네트워크 유언 광주시립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 자이니치 작가들 미술 시간

2023-02-10

[J네트워크] 자이니치와 코리안 아메리칸

배우 윤여정의 신작 ‘파친코’는 흡입력 있는 드라마이자 여러모로 색다른 작품이다. 그 중심인물인 선자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나고 자라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간 여성. 유장한 세월을 관통하며 그와 자손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드라마답게 선자 역할의 배우만 세 명이다. 나이든 선자를 연기한 윤여정 외에 어린 선자로 아역배우 전유나, 젊은 선자로는 신예 김민하가 등장한다.   이들을 포함해 이 드라마의 크고 작은 역할에는 낯선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다들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지난주 공개된 1~3부를 한꺼번에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이력을 찾아보니 동포 배우들도 있다. 선자의 아들이자 파친코를 운영하는 모자수 역의 아라이 소지는 ‘박소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재일동포, 선자의 손자이자 미국 유학 후 현지 은행에서 일하다 그 일본 지점에 돌아오는 솔로몬 역의 진하는 재미동포다.     이 드라마는 선자의 삶을 시대순으로 펼치는 대신 일제강점기와 1989년 솔로몬이 일본에 돌아온 무렵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제작진에도 재외동포가 여럿이다. 전체 8부작을 나눠서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 저스틴 전 감독은 모두 재미동포. 각본가이자 총괄프로듀서를 맡은 수 휴 역시 재미동포다.     널리 알려진 대로 원작 소설의 이민진 작가 역시 동포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려서 미국에 이민 간 그가 재미동포가 아니라 재일동포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어느 강연에서 한국인 중학생이 일본에서 겪은 차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다.     이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일본에서 4년을 살면서 여러 동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나온 ‘파친코’는 그의 두 번째 소설. 미국에서 2017년 출간과 함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되는 등 큰 반향을 얻었다.   ‘파친코’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이 제작진의 주축일 뿐 아니라 애플TV가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드라마다. 일제강점기부터 고난을 헤치며 살아온 한국 사람들 이야기가 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져 전 세계 시청자에게 공개된다.     다양한 언어권의 시청자를 고려해 매회 드라마가 한국어·일본어로 진행된다는 것, 두 언어가 서로 다른 색깔의 자막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알리는 영어 안내문도 나온다.   한국 시청자에게도 이 드라마는 새로운 경험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법적·제도적 차별 속에 살아온 한인, 이른바 자이니치의 이야기 자체가 우리네에게도 상대적으로 낯선 소재라는 점에서다. 미국 이민 생활을 경험한 윤여정 역시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제가 자이니치를 잘 몰랐다”며 “그 사람들이 산 세월을 알고 나니 너무 미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직 8부작 중에 3부까지 공개됐을 뿐이지만 그 격동의 드라마를 매주 정주행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후남 / 한국 중앙일보 문화디렉터J네트워크 자이니치 아메리칸 재일동포 선자 재일동포 이야기 중심인물인 선자

2022-04-01

[영화몽상] 자이니치와 코리안 아메리칸

 배우 윤여정의 신작 ‘파친코’는 흡입력 있는 드라마이자 여러모로 색다른 작품이다. 그 중심인물인 선자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나고 자라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간 여성. 유장한 세월을 관통하며 그와 자손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드라마답게 선자 역할의 배우만 세 명이다. 나이든 선자를 연기한 윤여정 외에 어린 선자로 아역배우 전유나, 젊은 선자로는 신예 김민하가 등장한다.   이들을 포함해 이 드라마의 크고 작은 역할에는 낯선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다들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지난주 공개된 1~3부를 한꺼번에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이력을 찾아보니 교포 배우들도 있다. 선자의 아들이자 파친코를 운영하는 모자수 역의 아라이 소지는 ‘박소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재일교포, 선자의 손자이자 미국 유학 후 현지 은행에서 일하다 그 일본 지점에 돌아오는 솔로몬 역의 진하는 재미교포다. 이 드라마는 선자의 삶을 시대순으로 펼치는 대신 일제강점기와 1989년 솔로몬이 일본에 돌아온 무렵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제작진에도 교포가 여럿이다. 전체 8부작을 나눠서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 저스틴 전 감독은 모두 재미교포. 각본가이자 총괄프로듀서를 맡은 수 휴 역시 재미교포다. 널리 알려진 대로 원작 소설의 이민진 작가 역시 교포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려서 미국에 이민 간 그가 재미교포가 아니라 재일교포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어느 강연에서 한국인 중학생이 일본에서 겪은 차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다. 이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일본에서 4년을 살면서 여러 교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나온 『파친코』는 그의 두 번째 소설. 미국에서 2017년 출간과 함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되는 등 큰 반향을 얻었다.   ‘파친코’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교포들이 제작진의 주축일 뿐 아니라 애플TV가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드라마다. 일제강점기부터 고난을 헤치며 살아온 한국 사람들 이야기가 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져 전 세계 시청자에게 공개된다.     한국 시청자에게도 이 드라마는 새로운 경험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법적·제도적 차별 속에 살아온 교포, 이른바 자이니치의 이야기 자체가 우리네에게도 상대적으로 낯선 소재라는 점에서다. 미국 이민 생활을 경험한 윤여정 역시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제가 자이니치를 잘 몰랐다”며 “그 사람들이 산 세월을 알고 나니 너무 미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직 8부작 중에 3부까지 공개됐을 뿐이지만 그 격동의 드라마를 매주 정주행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자이니치 아메리칸 재일교포 선자 재일교포 이야기 모두 재미교포

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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