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문화의 요람]문자를 통해서 본 우리의 고대사(3)
지금까지 문자의 창조와 발달과정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요약해 본다. 훈민정음 : 세종대왕께서 1443년에 창제,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 가림토문자 : 훈민정음의 모체가 되었다는 문자. 기원전 2182년(3198년 전) 가륵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만들었다. 녹도문 (鹿圖文) : 기원전 3890년(5906년 전) 경에 배달겨레 제1대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 혁덕을 시켜 만들었다. 문자의 탄생 과정을 통해서 단군조선과 그 앞 배달겨레의 실존에 대한 증명이 된 것이다. 오늘은 한자의 창제 과정을 살펴 보겠는데 뜬금없이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래의 내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주기를 바란다. 한자의 시조 창힐 중국에는 5000여 년 전, 황제의 사관(史官 )인 창힐이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로써 중국에서 최초로 문자가 생기게 된 것인데 창힐문자는 다시 은(殷)나라 시대 ( BC 1600 ~ BC 1046)에 이르러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했다.(은 나라는 동이족의 나라) 여기서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는 창힐문자는 황제의 사관 창힐이 만들었다고 했다. 또 중국의 역대 신선통감에는 창힐이 진창 사람으로 태호복희의 신하가 되어 거북 등과 새 발자국 을 보고 여섯 가지의 글자체를 만든 인물로 나와 있다. 먼저 황제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황제는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배달겨레 제 14대 자오지천황(치우천황) 때의 인물 이다.(배달겨레의 열 네번째 임금 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의 시조가 등장한다) 당시 치우천황의 스승이 자부선생이었는데 헌원, 창힐, 대요(요 임금)가 모두 자부선생 밑에서 신교의 문화와 철학을 전수받았다. 헌원은 삼황내문경을 전수받았고, 대요는 간지의 술법을 전수받았고, 칭힐은 부도지문을 전수받았다. 그 후에 헌원은 탁록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치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결국 10년간 73회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치우에게 사로잡혔으며, 이후 귀향살이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대목이 있으니 창힐이 진창사람으로 태호 복희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과 창힐이 동이족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중국의 창힐연구회 회장까지도 한자를 만든 창힐은 동이족이며, 공자 역시 동이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1902-1999)박사가 문교부장관 재직시 중국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림어당(1895-1976) 선생을 만나 여담으로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까지 문제가 많다”고 하자, 림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 대부분은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지 이미 오래인데 유독 우리나라의 제도권 사학자들만 이를 믿지 않으려 하고 있다. 러시아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로프는 “중국사에서”<기원 전 3천년 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 이동(以東)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500년 내지 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 지방에 진출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문자나 한자 창제의 기록뿐 아니라 역사, 문화의 흐름에서도 동이족의 역량을 간파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