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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떠나볼까,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음악의 나라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하이든,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베토벤의 고장이며, 지금도 연간 4500개가량의 크고 작은 음악제와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문화 대도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초원에서 메아리쳤다. 마리아와 트랩 대령의 아이들이 춤을 추며 도레미 송을 부른 곳은 미라벨 정원. 미라벨은 '아름답다'는 뜻으로 정직한 이름 그대로 궁전과 정원 모두 바로크 양식의 대리석 건물과 조각상 사이로 화려한 꽃들이 한껏 만발해 아름다움을 뽐낸다.   잘츠부르크는 음악의 신동 볼프강 모차르트의 고향이어서 도시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던 생가는 도시의 대표 번화가인 게트라이데 거리에 위치한다. 이 거리에는 유달리 개성 넘치는 간판들이 가득한데, 문맹이 많던 중세 시대에 글을 몰라도 상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림이나 조각으로 상점을 표시하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라고 한다. 생가 근처에는 모차르트 광장, 모차르트의 단골 식당도 있다.   또 다른 랜드마크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이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난공불락의 성은 900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성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도시 경관이 환상적이어서 잘츠부르크 내 '인생샷 맛집'으로 통한다.   문화예술 성지순례는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에서 계속된다. 비엔나야말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를 비롯하여 하이든,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브람스, 말러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모두 거쳐간 도시다.   로마네스크 및 고딕 양식의 성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혼'이라 불리는 명소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 슈테판에서 따왔다. 이 성당은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탑으로 올라가면 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뷰 포인트가 나온다.   베토벤 하우스도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다. 그가 연주하던 피아노와 편지, 조각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서 작곡한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헤드폰까지 설치되어 있다.   유서 깊은 쉔부른 궁전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다. 오스만투크르 군에 의해 본성이 파괴된 후 1696년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프로 새롭게 지어졌다. 삼위일체 상을 만든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고 이 궁전의 옅은 황금색 외벽은 일명 '쉔부른 황색'이라 불린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실내에는 방이 1441개나 되는데, 모차르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구혼했던 거울의 방이 특히 볼만하다.   도시 전체에 아름다운 선율이 흐를 것만 같은 비엔나의 명물이 아직 두 개 더 남았다. 바로 달콤한 비엔나커피와 호이리게다. 햇포도주에 소시지, 돼지고기, 감자, 양배추 절임 등이 곁들여지는 전통음식인 호이리게로 비엔나의 근사한 맛까지 빠짐없이 즐겨보자. 박평식 / US아주투어 대표·동아대 겸임교수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모차르트 슈베르트 모차르트 광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2024-05-16

[삶의 뜨락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구절이다. 막이 오르면 텅 빈 무대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외로운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떠돌이는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에스트라공은 벌판 한가운데 앉아 장화를 벗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블라디미르가 입장한다. 떠돌이 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사소한 대화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채우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누군지 모르는 그를 기다린다. 1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그래도 2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던 나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연극은 시작과 같은 방식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너무나 비관적이지 않은가? 누가 이 연극을 보러 가겠는가?’ 나 혼자 중얼거리며 극장을 나왔던 것이 1969년 한국 초연의 임영웅 연출을 보았던 나의 20대였다.   이 연극을 다시 보게 된 것은 2013년도 12월 말, 브로드웨이의 CORT Theatre에서였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한 브로드웨이의 한가운데여서였을까? 무작정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측은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 남의 나라에 와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나는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훤히 뚫린 길을 따라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전에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늦은 밤, 롱아일랜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늙은 방랑자들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 번째로 이 연극을 다시 본 것은← 4년 전 여름, 더블린에서였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연기하는 단막극이었다. 제임스 조이스, 새뮤얼 베켓, 오스카 와일드 등 문학의 거장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Duke’라는 술집에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그 분위기가 마치 중세기로 되돌아 간듯했다. 빨간 벽돌로 둘러싸인 이층의 작은 방에는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슬로바키아 등 주위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병을 높이 치켜들고 ‘I will have a pint!’라는 아이리시 가요를 부른 후 두 명의 배우가 나와서 2막의 한 부분을 연기한다. 그 후 우리는 모두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배우에게 다가가 “너는 ‘고도’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혹시 하느님 아닌가?” 하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지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문현답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無)에 대한 연극으로 유명하다. 스물두 살에 탈출의 꿈을 이루었고 파리에 상륙하여 제임스 조이스를 도와 일했고, 파리의 어느 포주에게 찔려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전쟁에 참여하여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하던 중 게슈타포에 거의 체포될 뻔했던 작가, 그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고통을 ‘고도를 기다리며’에 쏟았다고 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왜 지구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는 한 쌍의 인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빈약한 가정을 하고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Godot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의미와 방향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자신의 허무한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고귀함을 얻게 된다는 연극비평가들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다림은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다림 그 자체로 희망적이다. 이춘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고도 떠돌이 생활 제임스 조이스 독일 오스트리아

2022-12-07

지도자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하라

지도자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하라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국가지도자는 일신의 안녕과 정파적 이익을 위한 권모술수가 아니라 국가안위와 국리민복을 위해 냉혹한 결단을 감행해야 하는 숙명적 위치에  있다. 백성과 귀족, 군대의 신망과 충성을 받을 수 있는, 마키아벨 리가 제시한 군주상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한’ 타입이다. 그가 통치자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상고해 본받으라고 하는 군주의 덕목과 통치술은 일단 도덕적 이성적 관념의 잣대와는 무관하다. 인류 보편적으로 소망스러운 것들이 아니라 인류의 실제 역사에서 반복되며  시현된 내용을 추출한 것일 뿐이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가 도덕적이라고 해서 도덕적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논의의 핵심은  통치술의 기본은‘냉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절묘한 외교술로 19세기 유럽의 세력균형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냉혹한 ‘철혈’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유연했고,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했다.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일은 피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즉위 초기부터 진보파가 장악한 의회와 종종 충돌했다.     그러다가 1862년 그가 군사력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하고 군비 확장 예산을 의회에 제출하자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알프레드 룬 등 왕의 측근 관료 들 중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제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룬은 대신 의회에 맞서 대립 사태를 해결할 적임자로 당시 파리대사로 있던 강경파인 비스마르크를 빌헬름 1세에게 천거했다. 빌헬름 1세는 룬의 제의를 받고 비스마르크의 강한 개성과 전권을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한동안 임명을 망설인다. 그러나 의회의 반대가 거세지자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의 독대를 통해 왕의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강력한 자세를 확인한 뒤 1862년 9월 비스마르크를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의회 예산위원회에서 가진 취임 연설에서  그의 정책기조를  피력한다. "지금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 유명한 연설로  그는 이후 ‘철혈 재상’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엠스 전보사건’이었다. 7월 13일 아침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휴양지 바트 엠스에서 수행원들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가 빌헬름 1세를 방문해“스페인 왕위계승에 영구히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베네데티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요구한 내용은 빌헬름 1세가에게 모욕적인 것이었다. 이런 사실이 베를린에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다.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전보 내용을 자극적인 문투로 바꿔 공개했다. 프로이센 여론은 일개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고 분노했다. 프랑스 여론도 프로이센이 대국 프랑스의 요청을 무례하게 처리했다고 분노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미 국방개혁과 대외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룬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엠스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한 것은 독일 통일을 위한 비스마르크의 한  교묘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자는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3년 뒤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한 후 1852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3세였다. 그는 국내정치 감각은 뛰어났지만 대외정책에서는 큰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질서와 프랑스 국내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자신이 프로이센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고 싶었기에 프로이센에  먼저 전쟁을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프로이센 지배 하의 남부 독일 공국으로 진격해 독립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고 주변국의 태도를 오판해 프로이센이 보낸 신호를 한낱 엄포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했다. 선전포고 이후 사태는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비스마르크의 계획대로 전개됐다. 1970년 9월 2일 프랑스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 대패해 포로가 됐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10월경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완벽하게 포위한다. 고립된 시민들의 생활은 추위와 식량부족 등으로 처참했다. 국민 총동원을 위해 내무장관 강베타는 열기구를 타고 필사적으로 파리를 탈출한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프랑스 국민은 무력하기만 했다. 12월부터 프로이센군은 매일 수천발의 포탄을 파리에 퍼부었다.     4개월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파리 정부는 결국 항복했다. 파리가 함락되고 몇 달 후인 1871년 5월, 프랑스 임시정부의 행정장관 티에르는 비스마르크와 베르사이유에서 만나 가조약을 맺고 강화했다. 그리고 30년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때, 빼앗겼던 알자스와 로렌을 되찾아 독일제국의 영토에 병합했다. 더불어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에게 책임을 물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리고 조약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를 파리에 주둔시켰다.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군이 파리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파리 교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머물렀다. 프랑스는 임시정부를 구성해 전쟁을 계속 수행했지만, 결국 1871년 1월 수도 파리는 함락됐다. 1871년 1월 18일 북독일연방과 남부독일공국들을 합친 독일제국의 탄생과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식이  프랑스의 유서 깊은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렸다.     비스마르크의 대외정책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등 서방의 병력 지원 없이 외롭게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냉혹한 국제 안보 질서 속에서 ‘동맹’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의 주적이고  위험할 때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인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한미 연합훈련 확대와 미군 전략자산의 전개 등에 합의했다. 양 정상은 ‘핵은 핵으로 대응한다는 입장도 밝혔다..‘깜짝 쇼’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했다는 환상으로 국민을 눈속임했던 한미 정권이 모두 바뀌면서 비로소 김정은 정권에 대한 상식적 대응이 재개됐다. 북핵이라는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5년이 걸렸다. 지난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동맹이란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우리는 ‘평화’ 또는 ‘평화 프로세스’라는 말에 묻혀 살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특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그 ‘평화’의 자리에 ‘동맹’이 정권 교체를 이룬 것이다. 이번 한국 방문 때 바이든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보낼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헬로, 끝”이라고 답했다. 예전처럼 북한 지도자를 달래거나 띄워주기 위한 보여주기식 만남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정은이 바이든의 인사말에 핵·ICBM 실험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 한국, 일본이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호흡을 잘 맞춰야 한다. 김지민 기자지도자 여우 북핵 문제 오스트리아 전쟁 덴마크 전쟁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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