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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구절이다. 막이 오르면 텅 빈 무대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외로운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떠돌이는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에스트라공은 벌판 한가운데 앉아 장화를 벗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블라디미르가 입장한다. 떠돌이 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사소한 대화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채우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누군지 모르는 그를 기다린다. 1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그래도 2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던 나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연극은 시작과 같은 방식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너무나 비관적이지 않은가? 누가 이 연극을 보러 가겠는가?’ 나 혼자 중얼거리며 극장을 나왔던 것이 1969년 한국 초연의 임영웅 연출을 보았던 나의 20대였다.
 
이 연극을 다시 보게 된 것은 2013년도 12월 말, 브로드웨이의 CORT Theatre에서였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한 브로드웨이의 한가운데여서였을까? 무작정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측은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 남의 나라에 와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나는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훤히 뚫린 길을 따라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전에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늦은 밤, 롱아일랜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늙은 방랑자들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 번째로 이 연극을 다시 본 것은← 4년 전 여름, 더블린에서였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연기하는 단막극이었다. 제임스 조이스, 새뮤얼 베켓, 오스카 와일드 등 문학의 거장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Duke’라는 술집에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그 분위기가 마치 중세기로 되돌아 간듯했다. 빨간 벽돌로 둘러싸인 이층의 작은 방에는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슬로바키아 등 주위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병을 높이 치켜들고 ‘I will have a pint!’라는 아이리시 가요를 부른 후 두 명의 배우가 나와서 2막의 한 부분을 연기한다. 그 후 우리는 모두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배우에게 다가가 “너는 ‘고도’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혹시 하느님 아닌가?” 하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지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문현답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無)에 대한 연극으로 유명하다. 스물두 살에 탈출의 꿈을 이루었고 파리에 상륙하여 제임스 조이스를 도와 일했고, 파리의 어느 포주에게 찔려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전쟁에 참여하여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하던 중 게슈타포에 거의 체포될 뻔했던 작가, 그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고통을 ‘고도를 기다리며’에 쏟았다고 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왜 지구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는 한 쌍의 인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빈약한 가정을 하고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Godot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의미와 방향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자신의 허무한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고귀함을 얻게 된다는 연극비평가들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다림은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다림 그 자체로 희망적이다.

이춘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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