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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 이어 한국 참전용사 후원 시작, 선한 영향력 ‘인프레쉬’

욕실 용품 브랜드 인프레쉬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안검진 및 수술 후원 프로젝트에 이어 두번째 후원 사업 계획을 밝혔다.   인프레쉬는 지난 5월, 에티오피아 내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 안검진 및 수술 비용을 지원하며 국내외로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며칠 전 자사 홈페이지 통해 고객과의 통화 내용을 공개한 인프레쉬는 한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밝혔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남성은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로 몸이 안좋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였고, 온 가족이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힘든 기억이 있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고 전하며 인프레쉬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원 행보에 감사를 표했다.   이에 인프레쉬는 “오랜 시간 국내 참전용사들을 위한 후원을 다방면으로 고민해왔고, 해당 남성과의 통화를 통해 오랜 고민의 답을 찾았다”고 전하며 두번째 후원 사업으로 국내 참전용사들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해 나섰다.   생활고를 겪는 참전용사들이 어디서든 식사를 편히 할 수 있도록 선불 카드를 제작 및 매달 소정의 금액을 충전해 드릴 것을 밝혔다.   해당 카드는 인프레쉬의 기업 로고와 이름이 표기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태극기와 625 숫자가 들어간 디자인으로 구성되어있다.   기업의 선한 영향력에 앞장서고 있는 인프레쉬에 현재까지도 자사 고객센터로 감사 행렬이 끊이질 않으며 많은 국내 네티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고 있다.    박원중 기자 ([email protected])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한국 참전용사 국내 참전용사들

2023-06-05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고 박희민 목사가 남긴 이야기<1>

미주 한인교계의 거목 박희민 목사가 지난달 26일 눈을 감았다. 〈본지 4월27일자 A-1면〉   박 목사는 한인 사회의 산증인이었다. 지난해 3월 본지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인터뷰를 위해 박 목사를 만났었다. 인터뷰가 총 3차례 진행됐지만 더는 진행할 수가 없었다. 박 목사의 건강 문제로 추가 인터뷰 스케줄 일정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박 목사가 남긴 이야기를 서술 방식으로 기록해뒀다. 못다한 그의 이야기를 종교면에 게재한다.     인생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삶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움직인다.   여동생의 소개로 영국서 간호학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김영자)를 만났다. 1967년이었다.     결혼한 그 해 교단으로부터 월남 선교사로 임명받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비자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 당시 교단 선교위원장으로 있던 한경직 목사가 갑자기 보자고 했다. 선교 때문에 아프리카를 둘러보고 왔던 한 목사가 "에티오피아로 선교지를 변경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교단의 최고 어르신의 권유이니 군말 않고 마음을 바꿨다. 다시 1년의 준비기간을 가졌다. 공교롭게도 에티오피아 황제의 손녀 소피아 공주가 한국을 방문(1968년 2월)했다. 소피아 공주는 당시 서울영락교회에서 예배도 드렸다.   에티오피아와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해 서울영락교회에서 선교 파송 예배를 드렸다. 아내의 손을 잡고 한 살 되던 아들을 안은 채 에티오피아 땅으로 떠났다.     그 당시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에티오피아 선교사가 됐다. 막상 가보니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난은 선교사에게 숙명 아닌가. 복음 전파 사역과 구제에만 힘썼다.     에티오피아에서 둘째(딸)를 낳았다.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젖먹이를 키운다는 게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이 모두 풍토병에 걸렸다. 치료약도 없었다. 의료 시설조차 없었다.   두 아이들의 몸에서 자꾸만 진물이 나왔다. 너무 가려우니까 자꾸만 몸을 긁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몸을 긁지 못하도록 아이들의 손을 붕대로 감아 놓았다.   사명이 있었기에 나는 견딜 수 있었지만 젖먹이 아이들은 도저히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형(박희성 목사)이 뉴욕에서 개척 교회를 준비중이었다. 일단 아내가 아이들(1살ㆍ3살)의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971년 6월의 일이다.   일단 나는 에티오피아에 남아 사역을 감당했다. 아내는 형님댁에 머무르며 아이들 치료에만 전념했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느정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잠시 가족을 보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사이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전공을 살려 뉴욕 한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했다. 벌이가 생기니 기본적인 생활은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사이 아이들도 풍토병에서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다.   미국에 간 김에 놀고 싶지는 않았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그때 에티오피아에서 일이 터졌다. 1974년 공산화로 인해 선교의 문이 닫혔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국에 눌러앉게 됐다. 다시 한번 삶의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은 뒤 하나님이 어떠한 길로 인도하실지 기다리고 있던 중 청빙 제의를 받았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였다.   그 당시 토론토한인장로교회는 분쟁으로 인해 갈라져나온 교회였다. 아픔을 안고 있던 교회였다. 청빙을 승낙하기에 앞서 고민과 갈등이 이어졌다. 아내가 간호사로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 개척교회를 하는 형님을 돕고 있었다. 주변 동료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만류했다.     그 상황에서 거듭된 청빙 제의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목사는 결국 목회를 해야 한다. 그쪽에서 제시한 사례비는 미국에서 버는 것보다 적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버려야 했지만 결국 소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내가 결정을 하니 아내도 주저하지 않고 병원에 사표를 냈다.   미국에서 자리 좀 잡아가나 싶었는데 하나님은 다시 한번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하셨다. 1974년 7월에 그렇게 토론토로 향했다.   당시 토론토한인장로교회는 목사 반대파 교인들이 따로 나와 만든 공동체였다. 때문에 목회자에 대한 쓰라린 감정을 갖고 있던 교인이 많았다. 그러한 교회에 담임목사로 간다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교인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목사에 대해 교인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바꾸려고 했다. 교회에서 사택을 마련하라고 준 돈도 받지 않았다. 그 돈을 다 장학금으로 내놨다.     매일 각 가정을 만났다. 그때 이민목회는 이민자의 삶을 공감하고 같이 삶을 걷는 게 전부였다.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줬다. 교인들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함께 울었다. 그렇게 조금씩 관계가 형성되자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교인들이 마음을 여는 게 느껴졌다.   목회자로서 훈련도 많이 받았다. 목회와 학업을 병행하며 토론토대학에서 박사 학위(1982년)도 받고 녹스신학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며 학생들도 가르쳤다. 잠시 안식년을 이용해 하버드대학에서 '메릴 펠로우(merrill fellow)'로 신학을 연구했다.     나는 토론토한인장로교회에서의 사역을 회상하면 늘 '정말 재미나게 목회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즐거웠다.   목회가 즐거워지니까 자연스레 열매가 맺어졌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는 어느새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됐다. 이제는 안주할만도 했는데 그 지점에서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나와 교회를 위해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 같았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계획 인생 에티오피아 선교사 에티오피아 황제 그해 서울영락교회

2023-05-08

[이 아침에] 170년째 치워지지 않은 사다리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첫 번째로 가보고 싶어 하는 성지중의 성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의 현장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비아 돌로로사(고통의 길)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졌던 골고다 언덕은 헤롯대왕이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면서 돌을 뜨던 채석장이었다. 예루살렘 서쪽 성문 앞의 버려진 채석장을 사형장으로 사용했던 이유는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AD 31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자,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예수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과 무덤을 찾고자 성지를 순례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전이 세워진 것을 보고,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부탁해 AD 325년에 신전을 허물고 성묘교회를 세웠다.     현존하는 성묘교회는 AD 1149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졌으나, 1291년 아랍의 패권자였던 살라딘이 성지를 장악했다. 그는 성묘교회를 허무는 대신 교회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 중에서 하나를 돌로 완전히 막은 후 열쇠를 이슬람교 측에 맡겼다. 이때부터 오늘까지 성묘교회는 한 개의 문만 사용하고, 그 문의 열쇠는 지금도 이슬람교 측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성묘교회 내부는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이집트 곱틱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여섯 교파가 각각 한 부분씩 분할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며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1853년 각 교파가 교회 내의 거룩한 장소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평화는 깨어지고 말았다. 성묘교회 내에서 일정한 예배 공간을 차지한 각 교파의 사제들은 자신들의 구역에 다른 교파의 사제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 예로, 이집트 곱틱교회의 성직자가 성묘교회 옥상의 자기 구역에서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피해 의자를 에티오피아 정교회 구역으로 20센티미터 정도 옮겼다는 이유로 성직자들이 싸워 11명이 병원으로 후송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묘교회의 막힌 입구 위에는 170년째 치워지지 않은 작은 사다리가 창문 아래에 놓여 있다. 사다리가 놓인 곳이 어느 교파의 구역인지 그리고 누가 사다리를 그곳에 놓았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그 사다리를 치울 수가 없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삶 속에서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싸움을 한다.     기독교인의 삶이 갖는 독특한 특징은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세상을 넘어서게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화해의 길이며, 평화의 길이며,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는 진정한 생명 나무다. 죄의 용서,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의 확립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부활절은 하나님이 성묘교회의 작은 사다리 하나를 치우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을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부활하신 축제의 절기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이 아침에 사다리 사다리가 창문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묘교회 옥상

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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