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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웅전] 맬서스의 역설

인구학자 토머스 맬서스(1766~1834·사진)는 본디 성공회 신부였다. 부유한 가정의 7남매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성품이 고결한 사람’(묘비명)이었다. 케임브리지대 신학부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그는 구도자였지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혼을 위로해야 하는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발전이 하층 계급에 더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초기 산업사회에서 기계 문명이 식량을 증산하고 그것이 인구 증가로 이어질 때만 해도 자본주의는 축복일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의술도 발달하지 않고 피임에 대한 인식도 없던 당시로선 많은 자녀가 축복이 아니었다.   가난과 불결함에다 의료 혜택의 부족으로 열악했던 초기 자본주의가 영혼의 구제보다 현실적 삶의 구원에 더 마음 쓰게 만들었다. 당시 식량 증산은 산술급수적인 데 비해 출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아녀자 노동, 고한(苦汗) 노동, 영아 살해, 심각한 빈곤은 맬서스를 더 이상 신부로 묶어두지 않았다.   맬서스는 경제학을 공부해 『인구론』(1798)을 출판했다. 그가 보기에 폭증하는 인구 앞에 기껏 질병·굶주림·전쟁만이 인구를 감소시킬 수 있다면, 인구 증가는 재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구 감소를 위해 어떤 구체적 대책을 내놨는지 뚜렷한 논거를 찾을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맬서스의 역설에 함몰돼 있다. 인구 증가가 고민이 아니라 인구 감소가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안채 며느리 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고, 사랑채에서 손주들 책 읽는 소리가 들려야 하고, 담 넘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야 번족(繁族), 즉 일족이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이제 낭만일 뿐이다. 그나마 올해부터 출산율이 바닥을 찍고 증가한다니 국가의 축복인 듯 기쁘지만, 향후 30년이 걱정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맬서스 역설 인구 증가 인구학자 토머스 인구 감소

2025-02-10

[신영웅전] ‘역사 업자’의 시대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90)은 한무제 시대의 사관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사관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불운이 다가왔다.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인 이릉(李陵)이 흉노에 패전하고 그 죄를 문책당했다. 사마천은 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형을 받았다.   첫째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고, 둘째는 돈 50만 냥을 벌금으로 내는 것이고, 셋째는 남근을 자르는 부형(腐刑)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재산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형을 받았다.   사마천이 죽지 않은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역사를 집필하라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으려는 것이었으니 이 점에서 그는 위대한 역사가다. 물론 지난 2000년 동안 36명의 왕이 시역(弑逆)당하고, 52개 나라가 멸망한 역사를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기록하고 싶은 소명 의식이 있었다. 그의 역사 인식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충절인가, 결국 인간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가를 고뇌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수양서이자 경세서다.   지금 한국사회는 철 지난 ‘역사 전쟁의 시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역사의 정론(正論)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싸운다는 점이다. 이제 역사는 역사학자의 몫이 아니라 ‘역사 업자’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킨 무리는 사관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관은 ‘영혼의 노숙자(spiritual homeless)’로 세대교체가 끝났다.   선거철이 되면 관변 단체의 기관장 자리 하나 얻으려고 5·6공 시대부터 지금까지 기신거리고 있다. 그렇게 살다 끝내 한자리 얻는 것을 보면 그들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이미 역사학과 정치는 공생의 유대가 굳어졌다. 그것이 걱정스럽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역사 업자 역사 업자 역사 전쟁 역사 인식

2025-02-02

[신영웅전] 인간관계에 교훈 준 미자하와 위왕 고사

중국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신하가 있었다. 위나라 왕은 미자하의 재주를 아껴 남달리 대했다. 어느 날 미자하가 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다급한 마음에 왕명이라 속이고 왕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위나라 국법에 따르면 임금의 수레를 타는 무리는 다리를 자르게 돼 있었다. 미자하가 거짓말을 해서 왕의 수레를 탔다는 소문을 들은 위왕은 “어머니를 위해 중벌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효자”라고 칭찬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왕을 모시고 과수원에 나갔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따서 먹어보더니 유난히 달고 맛이 좋아 먹다 남은 반쪽을 왕에게 권했다. 미자하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였다. 그러나 위왕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자기 입맛을 잊고 나에게 먹였으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칭찬해줬다.   그러나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옛말처럼 위왕의 마음도 쉽게 변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대수롭지 않은 죄를 지었다. 그런데 지난날에 미자하를 그토록 감싸주던 왕은 갑자기 “너는 일찍이 왕명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훔쳐 탄 일이 있으며,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일이 있다”고 꾸짖고 벌을 줬다.   위왕과 미자하 고사를 인용하면서 나는 위왕을 교활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뜻도 없고, 미자하를 가리켜 불운하다고 동정할 뜻도 없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처음에 미운 짓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처음에는 착한 일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배신하고 도망가는 일도 흔히 있다.   그러므로 사랑받을 때 겸손하고 삼가야 하며, 사랑할 때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미움을 주고받을 때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잘못된 미움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가.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신영웅전 인간관계 교훈 위나라 국법 자기 입맛

2024-12-18

[신영웅전] 구텐베르크의 인생 유전

1440년대 어느 날 프로이센 마인츠의 한 집에 귀족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있었다. 30대 청년 구텐베르크는 도박판에서 연신 돈을 잃고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온 그는 돈을 딸 궁리는 하지 않고 도박용 골패(骨牌)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도장처럼 만들면 글씨를 대량으로 박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나무에 알파벳을 새겨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서구 최초로 만든 목판활자다. 그러나 그는 자금이 없었다. 휴머리라는 이웃집 부자 금은 세공업자를 찾아갔다. 이 사람은 사업 두뇌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휴머리는 구텐베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무 활자가 마멸되자 그들은 세공 기술을 이용해 구리 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기 시작했다.   최초로 만든 성경책은 양피지에 36행에서 시작해 42행을 거쳐 46행을 찍은 것인데 이를 마자린 판이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휴머리의 배신이었다.   자금주가 배신하자 방법이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낙심해 있을 무렵 낫소의 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 시장으로 부임해 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구텐베르크를 찾았다. 아돌프 2세가 성서 제작과 판로까지 도와줘 구텐베르크는 영화를 누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 성경이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구텐베르크의 일생을 보노라면 한 인간의 성공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먼저이며, 세상살이에 한때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줄 곡예사의 보호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씁쓸할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화인 인쇄술이 도박판의 골패에서 연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기까지 기만·배신·좌절, 그리고 인정가화(人情佳話)가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낙심할 것 없다. 그대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 테니까.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구텐베르크 인생 청년 구텐베르크 인생 유전 나무 활자가

2024-01-07

[신영웅전] 구텐베르크의인생 유전

1440년대 어느 날 프로이센 마인츠의 한 집에 귀족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있었다. 30대 청년 구텐베르크는 도박판에서 연신 돈을 잃고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온 그는 돈을 딸 궁리는 하지 않고 도박용 골패(骨牌)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도장처럼 만들면 글씨를 대량으로 박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나무에 알파벳을 새겨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서구 최초로 만든 목판활자다. 그러나 그는 자금이 없었다. 휴머리라는 이웃집 부자 금은 세공업자를 찾아갔다. 이 사람은 사업 두뇌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휴머리는 구텐베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무 활자가 마멸되자 그들은 세공 기술을 이용해 구리 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기 시작했다.   최초로 만든 성경책은 양피지에 36행에서 시작해 42행을 거쳐 46행을 찍은 것인데 이를 마자린 판이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휴머리의 배신이었다.   자금주가 배신하자 방법이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낙심해 있을 무렵 낫소의 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 시장으로 부임해 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구텐베르크를 찾았다. 아돌프 2세가 성서 제작과 판로까지 도와줘 구텐베르크는 영화를 누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 성경이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구텐베르크의 일생을 보노라면 한 인간의 성공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먼저이며, 세상살이에 한때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줄 곡예사의 보호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씁쓸할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화인 인쇄술이 도박판의 골패에서 연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기까지 기만·배신·좌절, 그리고 인정가화(人情佳話)가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낙심할 것 없다. 그대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 테니까.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구텐베르크의인생 유전 구텐베르크의인생 유전 청년 구텐베르크 나무 활자가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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