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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주에서 이민자 수감 급증...전국 5번째

이민단속법 시행으로 더 늘어날 듯   조지아주에 구금된 이민자의 수가 지난 1년간 50% 넘게 증가한 가운데, 고강도 이민단속법 시행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시라큐스대 부설 이민정보센터인 TRAC의 분석에 따르면 5월 현재 조지아 이민 구치소에 2408명이 구금돼있으며, 이는 지난해보다 약 54%가 증가한 수치다. 조지아는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해 구금된 이민자가 전국에서 5번째로 많은 주로,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은 주로는 루이지애나에 이어 2번째로 구금자가 많다.   전국적으로도 구금자가 늘었다. 2023년 5월 미국 전역에 약 2만1300명이 구금돼 있었지만, 1년 후 그 수는 70% 증가해 약3만6500명이 됐다. 같은 기간 멕시코에서는 불법 국경 통과 건수가 가장 높았다. 지난달 전국적으로 새로 구금된 이민자 수는 2만8000명을 넘었으며, 이는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2024 회계연도 중 가장 높다.   ICE 또는 국경순찰대는 합법적 신분이 없는 이민자를 조지아 이민 구치소에 수감할 수 있다. ICE는 국내 체포를, 국경순찰대는 불법 입국한 사람들을 국경에서 체포 후 일부를 ICE 구치소로 보낸다. 그런데 최근 국경에서 구치소로 보내진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TRAC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달 1만9000명이 넘는 이민자가 세관 및 국경 순찰대에 의해 국경에서 체포된 후 구금됐으며, ICE에 의해 구금된 사람은 8429명에 불과했다.   조지아에서 가장 큰 이민자 수용소는 콜럼버스 남부 럼킨 시에 있는 스튜어트 구치소. TRAC에 따르면 스튜어트 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1582명을 수용하는데, 이는 전국에서 3번째로 큰 이민자 수용소 규모다. 텍사스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국경에서 체포된 이민자들이 어떻게 조지아 수용소까지 오게 되는 것일까. 마티 로센블러스 변호사는 애틀랜타 저널(AJC)에 “무작위일 수 있다. 빈 침대가 어디 있는지의 문제”라고 전했다. 수용자 대다수는 인도주의적 보호 조치인 망명을 신청해 추방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해결은 요원하다.   로센블러스 변호사는 이어서 “스튜어트에 사람들을 보내는 이민국 직원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며 럼킨 법원의 망명 승인 비율이 평균 15% 이하로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AJC는 최근 조지아주에서 구금된 이민자들이 늘자 현지 이민자 옹호 단체들이 수감자들의 건강과 안전 문제를 언급하며 경종을 울렸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2024년 현재까지 조지아주 ICE 구금 시설에서 2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주뿐만 아니라 연방 차원에서 ‘반이민’ 정책이 강화되며 구금되는 이민자 수가 많아질 전망이다. 바이든 정부는 최근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망명 신청을 하는 절차를 제한하는 행정 명령을 내린 바 있다. AJC는 ICE에 논평 요청을 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도 조지아에서 이민자 구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주 법 집행 기관이 연방 이민국과 긴밀한 협력을 의무화한다는 법안이 제정됐기 때문이다. 윤지아 기자이민자 수용소 이민자 수용소 조지아 수용소 조지아 이민자

2024-06-18

[오늘 105주년 삼일절] 꽃길에서 만난 자유 뺏긴 두 민족

중가주 프레즈노에는 ‘블로솜 트레일(Blossom Trail)’로 불리는 유명한 꽃길이 있다. 매년 3월이면 이 길을 걷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시모니안 농장(Simonian Farms)으로 몰려든다.   아름다운 꽃길 이면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미주 한인들의 나라 잃은 슬픔과 일본계 미국인들의 배척당한 이야기가 함께 배어있는 곳이 바로 프레즈노다.   꽃길 너머 시모니안 농장 귀퉁이에는 25피트 높이의 목조탑이 있다. 전면에는 한문으로 ‘위령탑(慰靈塔)’이라고 적혀있다.     탑은 1943년 3월 강제 이주조치로 애리조나 수용소로 보내진 이 지역 일본계 미국인 농부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5년 세웠다. 탑 안내문에는 시모니안 일가가 이들로부터 농업 기술은 물론이고 근면, 성실의 가치를 배웠다고 쓰여있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계 미국인들은 1900년대 초 가주 채소 생산량의 약 40%에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 농장의 가격은 일반 농장의 거의 7배에 달했을 정도로 그들의 능력과 노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7일) 이후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해지자 당시 가주 채소 재배 협회 측은 곧바로 일본계를 서부 지역에서 추방하는 데 앞장선다. 가주의 농업 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일본계 농장주들을 전쟁을 빌미로 배제 또는 도태시키려는 속셈이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수용소로 강제 이주된 일본인들은 전국에서 12만명에 달했다.   시모니안 농장의 위령탑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20마일 떨어진 리들리 지역에는 미주 지역 한국 독립운동사의 상징이 세워져 있다. 14피트 높이의 독립문이다. 그 옆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한국 국가보훈부 등이 리들리시와 함께 22만 달러를 들여 세웠다.   1905년부터 한인들이 모여든 리들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계약 기간이 끝난 상당수의 한인이 본토로 와서 가장 먼저 정착했던 곳이다. 당시 약 500여 명의 한인이 이곳 농장 등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한인 사회가 형성됐고, 이후 미주 지역 항일운동의 근원지가 됐다.   삼일 운동 전후 2년 간(1918-1919) 리들리 지역 한인들이 한국으로 보낸 독립운동 자금은 1만3835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0만 달러(연방 노동부 자료 참고)가 넘는 돈이다. 농장 노동자 등으로 힘겹게 일하며 일당을 쪼개고 또 쪼개서 모은 돈임을 감안하면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독립문 인근 다뉴바 한인교회당 터를 가면 당시 독립 자금 기부자 명단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당시 다뉴바 한인교회 앞은 삼일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미주 한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펼쳤던 곳이다. 이후 이 교회 앞에서는 매해 삼일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1937년에는 리들리를 비롯한 중가주의 팔리어, 생거, 델라노, 다뉴바 등 5개 지역 한인들이 연합으로 삼일절을 기념하며 시가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리들리의 한인과 시모니안 농장 지역 일본인간의 마찰이나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두 민족 간의 어떠한 교류가 있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단, 공통점은 있다. 두 민족 모두 한 맺힌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일본계 미국인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수용소에 갇혀 배척을 당해야 했다. 결은 다르지만 한인들은 조국을 빼앗겨 애통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LA한인회를 비롯한 한인 단체들은 오늘(1일) 이곳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연다.   매년 봄이면 꽃구경을 하려는 한인들이 프레즈노를 즐겨 찾는다. 요세미티나 세코이아 국립공원 가는 길에 들르는 지역이기도 하다. 꽃길만 걷다오기에는 지난 역사가 아프다. 김인호 여행작가·장열 기자삼일절 105주년 삼일절 3.1절 리들리 한인 로스앤젤레스 LA 미주중앙일보 장열 일본계 시모니안 농장 프레즈노 일본인 수용소 독립운동 다뉴바 LA한인회 블로솜 트레일 김인호 여행작가

2024-02-29

[열린광장] 다시 불확실성의 시대에 들어 선 인류

지난 한 주 가슴 깊은 곳에 아픔을 느끼지 않은 이가 있을까. 또 다른 전쟁터에서 무고한 사람들과 어린아이까지 희생되는 것이 지구 저편의 일이라고 고개를 돌려도 마음속은 혼란의 파고가 인다.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때를 만났다. 인류가 다시 커다란 불확실성의 시대에 돌입한 여러 가지 현상을 보고 듣는다. 이제 엔데믹의 상황에서 막 생활을 가다듬는 인류가 아니었던가.     2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지구 저편 전쟁으로 인해 이미 수백만 명의 피난민과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위에, 지난주 또 다른 전쟁이 발발했다. 짧은 시간에 사상자는 이미 1만 명을 넘었는데 이 가혹한 전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난 수년간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그 그간에 자비함을 얻어 남은 자가 된 인류는 오히려 더 악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중 사람의 마음이 자고해 져서 스스로 혼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인류는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아침 햇살과 저녁 황혼을 즐기며 감사하면 된다. 그러나 이제 다시 마주친 혼란의 시대엔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거주하는 이 땅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삶의 여정을 재 정의할 필요는 없는지 있는지….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랭클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3년이나 지내며 자신이 만난 최악의 상황과 주변 사람을 관찰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그는 극도로 힘든 환경과 우울한 시간에서 발견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는 “어떤 환경에서든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존재 가능하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언가”라고 반문했다. 나는 그가 지금의 인류에게 묻는 메시지에  공감한다.   영성을 기초로 삼는다면 한 가지 더 대답해야 할 것 같다. 과연 주께서 내 삶을 향해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그것이다.     인류는 지금 스스로 만든 혼돈 가운데 있다. 지구 저편에서 계속되는 전쟁도 결국은 스스로 만든 혼돈의 일부가 아닐까.     성서에서 오늘의 질문에 대한 기록을 읽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변함없는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당시 이 작은 외침의 말을 깨닫지 못한 그 백성의 회복이 늦어진 역사가 동시대 다른 기록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현대인에게 말해주고 있는가. 다시 큰 불확실성의 시대와 맞닥뜨린 우리 모두에게 뜻밖의 평화가 임하되 늦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 자손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디렉터·미주장신 교수열린광장 불확실성 인류 정신의학자 빅토르 유대인 수용소 지구 저편

2023-10-19

“건설 관련 경험, 홈리스·주민안전 해결”…10지구 출마 레지 존스-소여

“법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책의 실행입니다. 10지구 주민들의 안전과 홈리스 관련 정책을 해결하는 데 주력할 것입니다.”   지난 15일 중앙일보를 찾은 LA시의회 10지구 후보 레지 존스-소여(사진) 가주 하원의원은 “홈리스 문제는 예산이 넉넉하고 수용할 공간이 있어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이슈”라며 “무엇보다 실행이 중요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시장과 모든 시의회, 산하 부처와 협력해 차근차근 풀어가겠다”고 밝혔다.     2012년 사우스 LA와 플로렌스-파이어스톤, 헌팅턴파크, 월넛파크를 관할하는 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내리 6선을 한 존스-소여 의원은 현재 하원 산하 공공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2015~16년도 회기에는 블랙코커스 의장으로 활동했다.     임기 만료로 내년 말 주 의회를 떠나는 그는 가주 의회에 진출하기 전 LA시 부시장 보좌관, 시 자산관리국 담당관으로 9년 동안 근무했으며, LA카운티 중소기업위원회 위원장, LA전문경영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LA시청에서 일하는 동안 볼드윈힐스에 있는 매직 존슨 극장과 스테이플 센터 아레나 건설을 포함한 대규모 개발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고객 친화적인 부서로 전환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을 받는다.   존스-소여 의원은 “시에서 쌓은 건물 개발 관련 경험을 토대로 시 정부 소유 건물을 찾아 홈리스 수용소로 신속하게 전환하려고 한다”며 “거리의 홈리스가 안전한 거주지에 옮겨 살게 하는 게 최우선 공약”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인타운 내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는 범죄에 대해서도 “한인들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 나는 경찰 예산 삭감에 반대한다. 치안 강화를 위해 LA경찰국(LAPD)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당선되면 “한인을 고위직에 임명해 커뮤니티의 의견을 지속해서 경청하고 관계를 다져나갈 것”이라며 “서로 간의 믿음을 쌓아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존스-소여 의원은 두 자녀를 홀로 키운 싱글대디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혼 후 방황했던 아들은 공립학교의 수학 교사로, 딸은 수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흑인으로 수학 교사는 내 아들이 유일할 것”이라고 자랑한 그는 교육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하원으로 수년 전 한국을 방문하면서 문화적 차이점을 많이 배웠다”며 “지금 내가 대표하는 지역구의 87%가 라틴계 유권자이지만 그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와도 그런 관계를 쌓아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주하원의원 시니어 10지구 후보 10지구 주민들 홈리스 수용소

2023-09-18

[김형석의 100년 산책] 자유를 찾아서…나도 탈북자의 한 사람이었다

1947년의 일이다. 해방 2년 후였기 때문에 북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정권 밑에서는 교육다운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내가 추진해온 중고등교육을 단념하고 월남하기로 했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었다. 7월 10일이었다. 집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등지고 생각에 잠겼다가 꿈을 꾸었다. 제복을 입은 보안서원이 나타나 장총을 내게 겨누며 “왜 김일성대학에 교수로 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미안하다. 더 좋은 사람을 추천하기로 했으니까 좀 기다려 달라고 약속했다” 했더니, 그가 그렇게 됐느냐는 표정으로 하늘로 향해 발포했다.   아내와 함께 탈북자 수용소 갇혀   그 총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산 아래 동네를 내려보았다. 내 동생이 헐떡이면서 뛰어오더니 “형님, 빨리 산속으로 도망치세요. 저 아래 자동차에 김현석 장로가 잡혀가는데 형님도 잡으러 올라올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 한 대가 우리 집으로 오는 길목에 서 있고, 두 사람이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차가 다시 떠났다. 김 장로는 내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 이사장이었는데, 그날 체포되었다가 6·25 때 피살되었다.   나는 탈북을 서두르기로 했다. 8월 16일 아침, 아내는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나는 아무 짐도 갖지 않기로 했다.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 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사리원에서 해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늦은 오후에 간신히 해주역에 도착했다. 가까이 있는 한 여관을 찾았다. 여관주인이 우리를 깊숙한 안방으로 안내했다. “안심해도 됩니다.” 탈북인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용강 바닷가로 가다가 검문을 받고 탈북자 수용소로 인계되었다. 초등학교 비슷한 두 채의 건물이었는데 앞 건물은 취조실과 남자수용소, 뒷 건물은 여자수용소였다. 나를 인계받은 계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벽에 걸린 전화통이 요란히 울렸다. 계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통화 내용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계장입니다.” “오늘도 월남하다가 잡혀 온 놈들이 많아요?” “예, 어제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막 평양에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놈들은 책임지고 무조건 북송하라는 명령입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온 계장이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딴방에 대기 중이던 아내에게 나오라고 했다. 부하 한 명을 불러 “이 가족을 버스 정거장에서 떠나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가 나간 후에 갑자기 쪽지 생각이 났다. 나와 함께 교사로 있던 조 선생이 “혹시 도움이 될까 알려 드리는데 제 누님이 해주에 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을 돕고 있는데 제가 전화번호를 드리겠습니다”라며 건넨 메모였다.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묻더니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여자는 내 아내를, 남자는 나를 이끌고 나섰다.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조 선생 누님이 인사를 하면서 “죄송하지만, 불편하시더라도 선생님은 다락방에서 쉬시고 사모님만 거실에 머물러 달라”고 했다. 검문관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나겠느냐고 물었다. 빠를수록 좋다고 했더니, 오늘 밤이나 새벽에 떠나도록 해보자고 했다.   자정이 넘었을 때였다. 안내원을 따라나섰다. 수수밭 안으로 들어서더니 바다 쪽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걸었다. 다행히 아들애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200~300m씩 왕복하면서 바닷가를 순시하고 있었다. 그 중간시간에 작은 나룻배가 와 닿았다. 탈북자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옆 숲속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서 배는 순식간에 만원이 되었다. 나는 아내를 태우고 더 올라탈 수가 없어 다음 배를 기다렸다. 10여 분 후에 또 한 척이 왔다. 남자 다섯이 곧바로 승선했다.   우리 배를 본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나 배는 이미 바다에 들어선 뒤였다. 마치 작은 배들의 전쟁터 같았다. 경비원이 탄 배가 나룻배를 쫓아가고 나룻배들은 큰 어선 사이로 숨어가곤 했다. 사공이 “위급하게 되면 수영을 하는 손님은 바다로 뛰어들어 어선들 뒤에 숨어라”고 했다. 아내가 탄 배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들애가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하느님께 돌보아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느님께 기도, “자유 만세” 외쳐   얼마 후 사공이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자유 만세!”를 선창했다. 나도 눈물을 닦았다. 새벽 시간이었다. 바다 남쪽 해안에는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있었다. 서북청년단원들이 월남한 사람들을 위해 새벽 한기를 피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사공이 “선생님들이, 우리도 자유로운 새 나라에서 살게 도와 달라”던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북청년단원에게 아내 이름을 적어 주면서 내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모닥불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 탈북자가 50~60명, 또는 그 이상일 것 같기도 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아내가 청년의 안내를 받아 찾아왔다. 우리는 말 없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믿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드린 것에 대한 감사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경비정에 끌려가는 나룻배를 셋이나 보았다는 것이다. 아들애는 그제야 눈을 뜨면서 엄마 품에 안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음을 참고 참았다. 자유는 목숨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탈북자 자유 탈북자 수용소 아내 이름 자유 만세

2023-06-09

[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부러운 7000명의 이름

한인 사회의 숙원 사업인 한미박물관 프로젝트는 지금 멈춰있다. 깜깜무소식이다. 변변한 박물관 하나 없는 LA한인사회는 옆 동네가 부럽다.   지난 2일 LA다운타운의 일미 박물관(Japanese American National Museum)을 찾아갔다. 지난 1999년 문을 연 이곳은 일본계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응집된 곳이다.   부러운 건 단지 건물이 아니다. 박물관 하나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탰던 7000명의 이름이 벽면에 가득히 새겨져 있다. 200곳의 일본 기업들도 참여해 무려 1000만 달러를 모았다. 그렇게 세워진 박물관이라 더 부럽다. 기부자들은 대게 이민 1세대이지만 부모들은 일본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자녀들의 이름으로 여러번 기부하기도 했다.   박물관 내부를 채운 빼곡한 내용물은 더 부럽다. 모든 게 사연이고 이야기다. 일본계 미국인에게 큰 상처로 기억되고 있는 만자나(Manzanar) 수용소의 기록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일본인 12만 명이 집단 거주했던 수용소 전체 축소모형 수용소 막사도 재현되어 있다. 심지어 부러진 채 녹슨 숟가락도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과 아픈 흔적이다. 일미박물관의 모든 자료는 아카데미 필름 아카이브와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제휴를 통해 공유하고 있다. 박물관 하나가 얼마나 내실있게 운영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옆 동네의 일미박물관을 렌즈에 담았다. 한인 이민사 120년을 맞이하면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든다. 가깝고도 멀었던 건 일본이 아닌 한인 사회의 숙원이다. 김상진 사진부장 [email protected]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이름 스미소니언 박물관 일미 박물관 수용소 막사도

2023-02-03

뉴욕시, 랜달스 아일랜드 수용소 폐쇄

뉴욕시가 랜달스 아일랜드에 설치했던 대규모 난민 수용소를 설치 한달 만에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10일 뉴욕시청은 최근 뉴욕시에 도착하는 망명 신청자수가 급감하고, 임시로 운영되고 있는 해당 수용소에 머물고 있는 난민 신청자들에게 영구적인 거주지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해당 시설을 다음주 내로 폐쇄한다고 밝혔다.   에릭 아담스 행정부는 지난 수개월간 텍사스주로부터 망명 신청자 2만3000여 명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호텔·셸터 등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성인 남성 500명, 최대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난민 수용소를 랜달스 아일랜드에 설치하고 지난 10월 19일부터 난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당초 난민 수용소 시설은 오차드비치에 설치됐으나 홍수·교통접근성 등의 문제가 지적되면서 랜달스 아일랜드로 변경됐다.   하지만 시설이 지어질 무렵부터 뉴욕시에 도착하는 망명 신청자 수가 급격히 떨어졌고, 뉴욕타임스(NYT)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주까지 약 170명 밖에 수용소를 이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날까지 랜달스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난민 신청자들은 14일부터 미드타운 맨해튼의 왓슨호텔로 이송될 예정이다.     NYT는 랜달스 아일랜드 난민 수용소 설치에 총 65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됐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난민 수용소 폐쇄는 셸터 최대 수용인원을 초과할 것이라는 뉴욕시의 우려와 달리 난민 신청자수가 줄어들어고 있다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지역매체 시티리미츠(City Limits)에 따르면 뉴욕시 내 셸터 인구는 6만5000명 내외로 우려했던 수치(10만명 이상)에는 못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심종민 기자 [email protected]아일랜드 수용소 아일랜드 수용소 난민 수용소 아일랜드 난민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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