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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한인회 위상 바로 세워야"

    애틀랜타 한인 원로들이 최근 흔들리고 있는 애틀랜타 한인회의 위상을 우려하며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자고 다짐했다.     애틀랜타 한인 원로회(Atlanta Legacy Society)는 지난 15일 둘루스 주님의 영광교회에서 모임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인 원로 40여 명이 참석했다. 은종국 전 한인회장이 식사와 수첩·수건 등 기념품을 후원했다.     원로회는 25년 이상 메트로 애틀랜타 지역에 거주하면서 한인 협회·단체의 장을 역임했거나 한인회 이사로 2년 이상 활동한 한인들의 모임으로 매년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원로들은 먼저 애국가와 별이 빛나는 깃발을 합창한 뒤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 그간 작고한 20명의 원로와 지난해 세상을 떠난 고 최진 변호사, 고 김선희 전 코스모 병원장, 고 이춘봉 전 재향군인회 남부지회장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박선근 대표위원장은 원로들의 활동에 고마움을 전하는 동시에 원로이자 선배로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당부했다. 박 위원장은 "내가 원로로서 자격이 있는지, 처음에는 대표위원장 타이틀까지 주니까 부담된 것도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마다 이 모임이 있다는 게 다행으로 느껴진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원로회는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갖고 출범한 게 아닌, 한인사회에서 훌륭하게 봉사한 분들의 공적을 조촐하게나마 기려 고마움을 전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지내는 데서 시작됐다"면서 "이민 사회에 먼저 도착한 선배로서, 한인사회가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책임감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한인 사회가 요즘 어지럽고 한인회의 (입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면서 "선장은 모든 결정을 내리고 이 결정에 책임은 필수적이며 선장 혼자서는 항해할 수는 없고, 선원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김학규 간사장의 정성과 의도는 엄청 좋지만 (갈수록 연로해) 이를 실천할 기력이 달리니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행사를 후원한 은종국 전 회장은 "지나온 한인 이민사회 역사도, 오늘날 우리 애틀랜타 한인사회도, 먼저 이땅에 온 선배들이 있었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지금도 적지 않은 분들이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게 참 감사하고, 오늘 같은 자리가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대접받는 것보다 대접하는 게 더 복이 있다는 사실 잘 아실 거다"면서 "오늘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원로회는 슈가로프한인교회(담임 최봉수 목사)와 송종규 전 애틀랜타 한국학교장에게 각각 사회 봉사상과 공로 감사상을 수여했다.     특히 슈가로프한인교회는 코로나19팬데믹이 시작된 후 '사랑의 음식 박스' 나눔 행사를 34회차까지 진행하며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해 이 상을 받았다. 박선근 위원장 2000달러, 권요한 전 대한체육회장 1000달러 등 총 3000달러의 헌금을  최봉수 목사에게 전달했다.  최 목사는 "한 번 봉사할 때마다 60~70명의 자원 봉사자가 참여했는데 이는 내가 상을 받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웃을 섬길 기회를 주신 것"이라며 "헌금은 이웃을 위해 사용하겠다. 감사하다"고 전했다.   배은나 기자

2021-10-15

대표가 만난사람<12> 애틀랜타한국학교 송종규 초대 교장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12〉 송종규 애틀랜타한국학교 초대 교장       //   수업 장소 간절했지만 찾아간 곳마다 번번이 퇴짜       //         아이들 콜라 쏟고 어지럽혀     어렵게 구한 곳서도 쫓겨나         "뿌리 교육 더 늦출 수 없다"   십시일반 한마음 성원 결실       1981년 한국학교 첫 수업     몇 시간씩 운전해서 오기도       //                 (전문)   기억은 퇴색한다. 기록이 없으면 신화나 설화로는 남을지언정 역사는 되지 못한다. 애틀랜타 한인 사회도 5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민 1세대들이 점점 나이가 들고 세대교체가 빨라지면서 초기 한인사회 기억들은 빠르게 잊혀져가고 있다. 한인 원로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다. 태동기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다양한 모습, 그것이 곧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든 뿌리이기 때문이다.         //   한국학교는 한국 밖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한글과 더불어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 등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를 통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민족의 얼도 이어간다. 조지아를 비롯한 동남부 지역에도 여러 한국학교가 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곳이 애틀랜타한국학교(교장 김현경, 이사장 이국자)다.   지난 5월 8일 둘루스 주님의영광교회에서 애틀랜타한국학교 개교 4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제26회 졸업식도 겸했다. 장기근속 교사들이 표창장을 받았고 11명의 학생이 졸업장을 받았다. 또 송종규 초대 한국학교 교장, 박선근 한국학교 개교 당시 한인회장, 김영준 총영사, 크리스 카 조지아주 법무장관 등이 이날 행사에 참석, 개교 40주년을 축하했다.   한글날 575돌을 앞두고 2세 한글 교육에 앞장서고 있는 애틀랜타한국학교 초대 교장을 만나 개교 전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 1981년이었죠. 애틀랜타 한국학교 초대 교장이자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두 직함을 모두 맡게 된 사연이 있을 듯 싶은데요.   “원래 애틀랜타 한국학교 이전에도 한국학교는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몇 년의 공백이 있었다. 그러자 한국학교 부활에 대한 한인사회의 요구가 커졌고 마침 한국 정부에서도 새로 한국학교를 지원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당시 한인회장이던 박선근 회장(현 한미우호협회 회장)이 남다른 추진력을 발휘해 한국학교 설립을 추진해 나갔다. 준비위원회도 구성되었고 후원 모임도 잇따랐다. 1981년 봄인가 싶은데 한국학교 개교를 위한 후원 모임이 있으니 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20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모두 한인사회에서 쟁쟁한 분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나로서는 그냥 참석이나 하자고 해서 갔는데 얼떨결에 그렇게 된 것이다(웃음). 또 한국학교 초대 교장으로 덕망 있는 분을 모시려 했지만 후보로 거론된 분들이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그 자리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게 됐다. 그때는 나도 40대 의사로 한창 왕성하게 일할 때였지만 한인사회의 미래를 담당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그래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 시작이니까 아무래도 기초를 세우는 일이었다. 수업 장소를 끊임없이 찾아야 했고 단체 정관을 만들어 주 정부와 IRS 등에 비영리단체 등록도 해야 했다. 초창기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커리큘럼을 만드는 일도 중요했다. 이런 일들을 위해 학교 안팎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선생님들도 참 많은 수고를 했다.”   송종규 박사의 회고는 2002년 출간된 ‘애틀랜타 한인 이민사’에 실린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애틀랜타 한국학교는 1981년 7월 메모리얼 아트센터 옆에 있는 미국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교육관에서 처음 개교했다. 그 전에 당시 박선근 한인회장이 한국학교 창설 준비위원회(위원장 방창모)를 구성하고, 동 위원회에서 위촉한 이사회 초대 이사장 겸 교장으로 송종규씨를 선출함하는 등 사전 작업이 진행됐었다. 당시 신문 기록에 따르면 개교 첫해 한국학교 등록 학생은 미국인 학생 3명을 포함해 모두 115명이었다. 개교 당시 교사는 김경숙(국어), 강은희(음악), 안재복(미술), 나오희(음악), 지혜정(국어) 등이었다.   - 개교를 전후해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요?   “수업 할 장소를 구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미국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곳을 찾아 다녔지만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 당시 김경숙 선생과 함께 디케이터에 있는 어떤 미국 교회를 찾아갔을 때가 기억이 난다. 청소비, 수도비, 전기비 등 유틸리티 비용은 대겠다고 했지만 렌트비부터 갖고 오라면서 거절을 당했다. 그 때 터덜터덜 걸어 나와 잔디밭에 앉아 한숨을 쉬어가며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얼마나 낙담이 되던지. 그렇게 열 곳도 더 되는 곳을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하이뮤지엄 옆에 있는 미국 제일장로교회에서 허락을 해 주어 역사적인 개교를 할 수 있었다.”   -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그 이후엔 장소 문제는 없었나요?   “그렇게 어렵게 구한 교회에서도 바로 쫓겨났다. 아이들이 콜라를 쏟는 등 교회를 너무 어지럽힌다는 게 이유였다. 집 없는 설움을 절감하며 다시 수업 장소를 찾아다니는 게 일이 됐다. 다행이 1982년 1월 다운타운에 있는 애틀랜타 태버너클 침례교회(Atlanta, Baptist Tabernacle)에 새로 둥지를 틀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장소 물색의 어려움은 한인 이민사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송종규 초대 교장에 이어 2대 김태형 교장, 3대 방창모 교장도 태버너클 침례교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고마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 교회 샤럿(Mr. Sarratt) 목사는 렌트비도 안 받고 교육관까지 쓸 수 있도록 적극 후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김태형 2대 교장은 “아이들이 책상을 부수는 등 난리가 나서 샤럿 목사님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세상 모든 것과 교회안 모든 물건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 교회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태버너클 침례교회로 옮긴 애틀랜타한국학교는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수업을 하다가 1992년 8월에 한인천주교회 교육관으로 이전했다. 이후 노크로스고등학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애틀랜타한국학교 외에도 교회나 성당 등에서 운영하는 다른 한글학교도 잇따라 생겨났다. 한인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애틀랜타한국학교 만으로는 증가하는 학생들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도  한글 교습 외에 한국 역사, 태권도, 북, 민요, 서예, 역사, 동요, K-팝 등의 다양해지고 있다.     한편 애틀랜타한국학교는 지난해 2020년 9월 둘루스에 2452스퀘어피트 크기의 사무실을 구입,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초창기 한국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학생도 선생님도 다들 열정이 넘쳤다. 1981년 첫 수업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 학부모님들 역시 멀리 앨라배마에서도 오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몇 시간씩 운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말과 우리 글, 우리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눈물겨웠다. 고국 떠나온 이민자로서 오히려 나라 사랑, 모국 사랑의 마음이 더 컸던 게 아니었나 싶다.”   - 한국학교를 운영하자면 돈도 많이 필요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수업료는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힘들었다. 이사회를 중심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각계에서 여러 분들이 성금도 보내주셨다. 미국인 중에도 한국전 참전용사 등 성금을 보내주는 분들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데 아마 1982년 쯤인가 한국학교 기금마련을 위한 가수 이미자 초청 공연도 했었다. 다운타운 시빅센터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한인들이 성원했고 공연장도 거의 다 찼던 것 같다.”   -그렇게 세운 한국학교가 벌서 40년을 맞았습니다. 초대 교장으로 또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텐데요.   “40주년 기념식에 함께했다는 게 영광이다. 개교 초기 함께 수고했던 분들이 이젠 다들 연로해졌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데 그래도 우리가 시작한 한국학교가 40년이나 이어져온 것을 보면 모두 흐뭇해하고 대견해 하실 것이다. 10년 뒤 50주년 행사는 더 발전된 모습으로 더 멋지게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이제 개인 이야기도 좀 들어보겠습니다. 1970년부터 애틀랜타에 정착하셨는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애틀랜타 오기 전까지는 나는 조지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뉴욕에서 수련의로 일하면서 뉴올리언스로 출장을 가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숲이 많고 아주 좋아 보여 곁에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저기가 바로 조지아, 애틀랜타라고 했다. 그때 속으로 아, 저기 가서 살면 좋겠구나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당시엔 여전히 흑백 분리 화장실이 있었고 식당도 백인과 유색 인종이 따로 들어가는 곳들이 많았다. 지금은 정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70년 초에는 한인사회라고 하기에는 한인들도 거의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조금씩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모임도 생겨나고 한국학교의 필요성도 더 커졌던 것 같다.”   -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 일하셨는데 미국에서 외국인 의사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1967년 뉴욕으로 왔을 때부터 정신없이 일했다. 애틀랜타에 와서도 전문적인 일을 해서 그런지 특별히 차별받거나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그때는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여러 인종의 수많은 아이들을 받았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 은퇴  후엔 어떻게 지내시나요?   “평생 일만 하느라 인문학 책을 많이 못 읽었다. 뒤늦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옛 친구들이 함께 하는 독서모임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딸이 가까이 살아서 손주 봐 주는 것도 요즘 우리 부부에겐 중요한 일이다.”     - 긴 시간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내가 이제 80이 넘었다. 지내 놓고 보니 인생은 지뢰밭 사이를 헤쳐 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고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또 오늘 좋다고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늘 겸손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 한국학교도 교사와 장소 확보, 자금 문제, 교과 과정 수립 등 지난 40년 동안 문제는 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도 그렇게 잘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전 세계에 한국학교는 13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 중 40년 역사를 가진 곳은 흔하지 않다. 그만큼 애틀랜타한국학교가 오랜 시간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는 데 큰 역할 해왔다는 말이다. 애틀랜타한국학교만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모든 한국학교가 꿋꿋이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송 박사를 비롯한 모든 한인 1세대들의 공통된 염원일 것이다.       ▶송종규 박사는   1940년생. 산부인과 전문의로 평생 일했다. 1964년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대 3년을 마친 뒤 1967년 미국에 왔다. 뉴욕에서 수련의를 마친 뒤 1970년부터 애틀랜타 정착했다.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부인 송(박) 영혜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과 딸은 의사, 작은 아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한다.   글·사진=이종호       〈사진설명〉   -송종규 박사가 1980년대 초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애틀랜타 한국학교 개교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송종규 박사 부부. 부인 박영혜씨도 이대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로 최근 은퇴했다.   - 1980년대 초 한국학교 관련 기사와 광고들. 송종규 이사장 명의로 실린 후원 감사 광고가 눈길을 끈다.  

202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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