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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풀이처방] 금쪽이들의 세상

예전 어른들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요즘은 한술 더 떠 자기 자식을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고 한단다. 자식을 아끼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간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지나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여기는 ‘금쪽이 콤플렉스’가 결국 초등학교 교사를 극단적 선택까지 몰고 간 엄청난 사건. 외신에서 다룰 정도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국제적 눈총을 받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국민이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앞날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금쪽이가 늘어나고 있는가. 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것인가. 부모의 집착은 분리불안에서 온다. 아이를 품에서 내놓으려고 할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이 분리불안이다. 건강한 부모는 그럼에도 아이를 독립시키려 한다.   문제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부모들은 아이를 평생 아이로 데리고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집착은 금쪽이 콤플렉스를 만들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처럼 사육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분리불안이 심한 부모들이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건수가 언론보도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아동학대 사건이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며 자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합리화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금쪽이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까. 심리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자기애적 성격장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란 ‘세상에 나밖에 없어’ ‘니들이 나를 감히’ 하는 식으로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진상이란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교사건 누구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니가 감히’ 하면서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학대까지 한다. 그래서 교사학대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가진 금쪽이들은 대체로 멍청하다고 한다. 멍청함에 대해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멍청함도 마찬가지다. 멍청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멍청함을 인정하기는커녕 오만한 태도로 되려 주변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단정 짓는다.”   『멍청한 놈들』이란 책을 쓴 에런 제임스 교수는 멍청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멍청한 사람이란 주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이 부유하거나 잘생겼거나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거칠 것 없이 행동한다. 또한 남을 배려하지 못하기에 멍청한 짓을 스스럼없이 한다. 오랫동안 그래 왔기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권력의 꼭대기에 오를수록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매사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불안감에 시달린다. 일상이 경쟁이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수명이 짧은 편이다.”   금쪽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부모와의 관계이다. 이들은 부모에 대한 효성심이 부족하다고 한다. 과보호를 받다 보니 부모도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종처럼 여긴다. 그래서 상속분에 불만이 생기면 가차 없이 부모에게 소송을 건다. 심지어 부모를 폭행하고 살인하는 괴물도 있다. 현대판 고려장을 하는 자식들의 대부분은 금쪽이들이다.   이들은 갑질을 일삼아 사회적 분열을 일으키고 소위 빨갱이가 생기게 하는 근본 원인자들이다. 그래서 금쪽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유난히 빨갱이 놀음이 심해진다. 미래 국가 위상을 떨어뜨리며 나라를 퇴행하게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나무가 어릴 때는 다른 나무들과 가까이 심지만, 나무가 커지려면 서로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부모 품이 필요하지만 성장하려면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부모에게 의지하면서 어른 아닌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   몇 해 전 유럽에서 비 오는 날 어린아이들이 산보하는 것을 보았다.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우산도 없이 우비만 입고 선생님을 따라 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우리 엄마들이 기겁했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그러자 가이드가 “걱정하지 마세요, 쟤들은 감기를 몰라요” 한다.   강아지처럼 둘둘 싸고 다니는 우리 아이들과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뛰어노는 유럽 아이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이 커서 저렇게 강하게 자란 아이들과 경쟁이 될까 하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솟구쳤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들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덴마크 얀테의 법칙을 배울 필요가 있다. 홍성남 /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금쪽 학부모 자기애적 성격장애자 평생 부모 예전 어른들

2023-09-08

[속풀이처방] 성인(聖人)이 필요한 시기

요즘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우리나라의 민낯을 보면 마치 도떼기시장 같다. 좁은 땅덩어리에 붙어살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며 삿대질하고, 극단적인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반으로 나뉜 나라가 다시 반으로 동강 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든다.   고학력 해외유학파 경제 사기범들은 서민들의 피 같은 돈을 날로 먹고 튀질 않나,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마약에 우리 아이들이 손을 대질 않나. 도떼기시장도 이런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정부는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큰소리치지만,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이다. 법으로 인성을 고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법집행자들의 윤리성을 신뢰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는 법치란 말이 비아냥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다. 사회의 존경을 받는 대상이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가정에 어른이 없으면 콩가루 집안이 되듯이 나라에 어른이 없어도 같은 현상이 생긴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판을 치고 그 틈새에 사이비 종교들이 기세를 부린다. 그래서 법보다 존경받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존경의 대상을 성인(Saint)이라고 부른다. 성인은 사람에 대한 최대 존칭어이다. 성인들은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안에서도 아주 중요한 존재 의미를 갖는다.   성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인들은 쓰러져가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등대 같은 존재들이었다. 중세 유럽의 많은 신자가 부패한 성직자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하여 교회에 등을 돌리려 하다가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수많은 선행과 기적을 일으킨 성인들 덕분이었다. 성인들은 대부분수도자이었고, 이들은 신자들의 신앙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학자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를 교황들의 교회라 하지 않고 성인들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성인들을 머리 뒤에 후광을 두른, 세상과는 별개로 격리되어 사는 별종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많은 성인은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성인을 소개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를 들 수 있다. 흙수저·금수저를 따지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산다는 천민 철학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사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 마더 테레사 수녀이다.   미국인 군종신부 에밀 카폰은 어린 동생 같은 미군들을 돌보려고 같이 포로로 잡히었고,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돌보다 병사한 신부이다. 그의 마음은 적군조차 감동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의 신분으로 돈도 명예도 마다하고 내전 중인 남수단에서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인 나환자들과 함께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물을 모른다는 남수단 아이들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이다. 불자인 구수환 감독은 자신과 종교도 다른 가톨릭의 이태석 신부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오염된 한국사회의 치유를 위해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알리고자 오랫동안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에 많은 관객은 ‘울지 마 톤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성인은 종교만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한 성인들은 세상의 희망이자 별이다. 이런 별들이 많을 때 암흑 속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중세 유럽 가톨릭 국가들이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성인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성인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살레시오회에서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강의를 하던 중 당혹감을 느꼈다. 아이들 중 절반은 잘 웃고 감정 표현도 잘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수사들에게 물으니 무표정한 아이들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인데, 한 달 후면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법이 아니라 성인 같은 선한 사람들임을 그곳에서 보았다.   선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악한 자들이 발붙일 자리가 없는 세상이 진정한 민주사회이고,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불교·이슬람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에서 성인들이 많이 나와서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등대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성인 시기 이태석 신부 천민자본주의 사회 군종신부 에밀

2023-05-29

[속풀이처방] 도인

요즘 우리나라에 갑자기 도인 열풍이 불었다. 도인·법사 등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정치판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긴 수염을 기르고 산속에서 구름을 타고 다닐 줄 알았던 사람들이 권력층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세간의 여론이 분분하다. 그래서 가톨릭 사제 입장에서 도인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가톨릭 신부가 어떻게 도인을 아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도인처럼 사는 분들이 많았다. 세상을 멀리하고 사막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악한 영들과 평생 사투를 벌인 분들의 이야기는 가톨릭교회사에 오래전부터 기록되어 왔다. 이분들의 여러 가지 특질을 통해 참 도인과 가짜 도인을 식별해 보겠다.   참 도인과 가짜 도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향하는 욕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사람의 욕구에 위계가 있다고 하였다. 간단하게 상위 욕구와 하위 욕구로 구분하는데, 하위 욕구란 소유욕을 근간으로 하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등에 대한 욕구와 권력에 대한 욕구,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하위 욕구다. 상위 욕구는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 존재론적인 욕구로, 삶의 의미, 인간 사회의 존재성에 대해 탐구하려는 욕구이다.   상위 욕구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속세에 무심하다.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무소유가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상태로 산다. 수도자의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단출하게 산다. 마음을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유혹이라 생각해서 아예 근처에도 못 오게 하려고 사람들이 오기 어려운 사막에서 수행한 수도자들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 사막의 바위기둥 위에서 수행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 것들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말한다.   반면 가짜 도인들은 하위 욕구를 추구한다. 소유물에 대한 집착과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해서 하이에나처럼 권력층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빈약한 정신세계를 은폐하기 위해 요란하게 차려입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도 많다. 속 빈 강정이고 가짜 도인들이다.   정서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이들은 가난의 영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남루한 차림으로 가난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주목받고 싶어 하기도 한다. 가짜 도인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영적 연출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별것 아닌 작은 이적을 자신의 큰 영험한 능력인 것처럼 사기 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여러 가지 속임수로 자신을 이상화하고 심지어 신격화하기도 한다.   참 도인과 가짜 간의 또 하나의 차이점은 겸손이다. 겸손의 어원은 라틴어로 ‘HUMUS’, 즉 땅이다. 사람들이 밟고 다녀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땅인데 참 도인은 땅과 같다. 그래서 세간의 입방아에도 흔들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다. 이들은 익은 벼처럼 고개 숙이고,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이 덜된 자, 무지한 자임을 부끄러워하며 산다.   이에 반해 가짜 도인은 요란한 빈 수레 같다. 이들은 자기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보았노라 주장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잘난 체하며 심지어 스스로 영험하다 자랑한다. 참고로 이들이 본 것들은 대부분 신경증적 망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상을 좇다가 망상으로 변질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망상이 마치 예언이나 점괘인 양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자기 내면을 탐색하지 않으면 내면이 썩어들어 간다. 가짜 도인은 마치 포장을 잘하였지만 속은 썩은 생선 같아서 언행에서 썩은 내가 진동한다. 참 도인은 내면이 생명수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 가짜 도인은 내면이 썩은 물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가짜 도인은 심리적으로 빈곤한 사람들, 심각한 결핍 욕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도인이란 자리는 도를 닦는 자리가 아니라 생존수단이기에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참 도인들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가짜 도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참 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가짜 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참 도인들은 자신이 속물이라고 한다. 가짜 도인들은 자신이 천상계 사람이라고 한다.   가짜 도인들이 설치는 것은 사람들이 허상을 좇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가짜 도인들이 세상을 주물럭거리는 시대가 될 것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도인 가짜 가짜 도인들 하위 욕구로 상위 욕구

2022-02-20

[속풀이처방] 지옥

 요즘 지옥 이야기가 자주 회자한다. 드라마 ‘지옥’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그 드라마를 몰아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떠올렸다. ‘저게 말이 되나. 유아적 망상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말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비 종교, 전두환 시절의 공포정치, 보안사와 제주 4·3 사건 등이 연상돼서였다.   드라마 속 지옥은 권선징악을 상징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개념은 종교 안에서도 비슷하다. 지옥론이 종교계에서 거론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당시에는 신자들이 문맹이기에 일명 지옥도라는 그림으로 가르침을 준듯하다. 지옥도는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있는데, 불교계의 지옥이 더 다채롭게 표현된다.   드라마를 본 많은 이들은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곳인지를 궁금해한다. 오래전부터 무신론자들은 지옥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지옥’과 ‘사랑이신 신’의 존재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신이 자기 창조물을 지옥 불구덩이에 집어 던진다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인생의 불공평성을 놓고 볼 때 지옥의 존재는 잔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세상은 태어날 때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을 때도 불공평한데,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을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여 지옥행을 결정한다면 그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대개 심리적으로 병적인 종교인이 만든 지옥론에 대한 반박이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지옥은 신이 인간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신을 버린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성인들은 천당에 있지 않고 지옥에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신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에게 학대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옥 같은 가정 안에서 살던 기억이 종교까지 연장돼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공포 신앙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 중에 으뜸은 공포심이다. 군부 독재 통치를 겪어본 사람들은 공포정치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안다. 위축된 자아, 정신적 질환,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감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포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 신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즉 가학-피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중세가톨릭은 지옥론으로 신자들을 통제하려 하였고, 이런 방법이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중세에 머무는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지옥론은 신자들을 노예화하지만 반대로 교주는 신격화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판단자인 듯이 선민의식을 가진다. ‘14만4000명’처럼 숫자로 사람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천국행 선발권이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신도들은 교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병적인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 ‘화살촉’ 같은 자들이 설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잣대를 휘두르면서 열등감과 권력욕을 채우려는 인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이단이니 악마니 하며 마녀사냥을 한다.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종교 안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자들을 보면서 지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만약 그런 자들을 보내는 지옥이 없다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에서 자국민을 학살하는 자들에게 지옥문이 열려서 드라마에 나오는 사자들이 데려가길 학수고대한다.   지금 사는 것이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저세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지옥살이를 면하게 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지옥 드라마 지옥 불구덩이 요즘 지옥 공포정치 보안사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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