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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시험 더 어려워진다

시민권 시험이 앞으로 더 어렵게 바뀌면서 영어 실력이 낮은 이들이 미국 시민이 되는 게 쉽지 않아질 전망이라고 AP통신이 5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민서비스국(USCIS)은 2008년에 마지막으로 변경한 시민권 시험을 15년만에 업데이트하기로 했으며 새 시험을 올해 후반기에 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새 시험에서는 영어 말하기 영역이 더 어려워진다.   현재는 시험관이 영어 말하기 능력을 평가하는 데 응시자가 이미 귀화 신청 서류에서 답한 개인 정보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쉬운 편이다.   그러나 새 시험에서는 시험관이 일상적인 상황을 담은 사진들을 보여주면 응시자가 그 내용을 영어로 묘사해야 한다.   또 다른 변화는 미국 역사와 정부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영역으로 단답형에서 선다형으로 바꾼다.   예를 들어 지금은 시험관이 ‘미국이 1900년대에 치른 전쟁 하나를 대라’고 하면 응시자는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 등 5개 정답 중 아는 전쟁 하나를 답하면 된다.   그러나 새 양식에서는 응시자가 직접 질문을 읽고 미국이 1800년대에 치른 전쟁 3개를 포함한 4개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전문가들은 영어를 잘 못하거나 교육 기회를 누리지 못한 난민, 고령 이민자, 장애인 등이 새 시험을 통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김은별 기자시민권 시험 시민권 시험 세계대전 한국전쟁 영어 실력

2023-07-05

LA도서관, 김영옥 대령 집중 조명

고 김영옥 대령(1919∼2005)이 한인 최초로 미 육군 장교 교육기관인 육군 지휘참모대학(CGS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운데 〈본지 5월 19일 자 A-1면〉, LA시 공공도서관(LAPL)도 아태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김 대령을 조명하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3권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LAPL은 소식을 전하는 블로그에 김 대령을 “1919년 LA에서 태어났으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한국계 미 육군 장교이자 시민 지도자이며 인도주의자였다”고 소개하고 그의 활동과 업적을 성장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아시안 커뮤니티에 대한 헌신까지 4개 섹션으로 나눠 자세히 설명했다.   먼저 김 대령이 대단한 애국심을 갖고 성장했으며 당시 미군이 아시아계의 입대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군대에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정된 법에 따라 1941년 1월 육군에 입대한 최초의 징집번호를 가진 군인이 됐다고 소개했다.     특히 김 대령이 1948년과 1952년 올림픽에서 다이빙 금메달을 딴 최초의 아시안이자 한인 커뮤니티의 또 다른 전설인 새미 리 박사와도 친구였다고 알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운영하던 세탁소를 팔고 다시 한번 한국에서 싸우기 위해 미군에 입대했으며, 미군에서 전투 대대를 지휘하는 최초의 아시안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이후 김 대령이 퇴역한 후 아시안 커뮤니티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현 이웃케어의 전신인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인박물관, 한인타운청소년센터의 전신인 한인청소년문화센터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계 커뮤니티를 도와 일미박물관 설립을 도왔으며 마이크 혼다 전 연방의원이 상정해 제정된 위안부 결의안을 강력히 지지한 리더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밖에 2009년 한인타운에 김영옥중학교가 개교했으며, 2010년 UC리버사이드에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가 설립돼 이름을 빛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LAPL는 김 대령의 일대기가 담긴 책으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장태한 소장이 번역한 ‘이름 없는 영웅: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 데릭 밀러의 ‘한국전쟁에서 싸운 소수계 군인들(Minority Soldiers Fighting in the Korean War)', 테어도어 준 유의 '한국: 분단된 두 나라의 탄생(The Koreas: The Birth of Two Nations Divided)'을 추천했다.   자세한 내용은 도서관 웹사이트(www.lapl.org/collections-resources/blogs/lapl/spotlight-young-oak-kim)에서 찾을 수 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la도서관 김영옥 김영옥 대령 la도서관 김영옥 세계대전 한국전쟁

2023-05-18

[이 아침에]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

시간은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시미밸리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했던 건 시간에 대한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다. 10월 9일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이 전시된 그곳은 포성 없는 전쟁터였다. 실제 크기의 탱크에서부터 통신 장비와 암호를 찍어내던 타자기들, 작은 파편조각까지 오밀조밀하게 전시된 대통령 기념관 안에는 꽤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주로 백인들이었고 아시아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장소에 섬광을 뿜어내듯 한 전시판이 눈에 확 뜨였다. 어! 저 사진은?   군복을 입고 찍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3남매 사진과 설명이 적힌 판이었다. 한 손으로 권총을 쥐고 사격하는 수산 여사의 사진과 필립 안의 모습 등 4점의 사진과 훈장이 걸려있었다. 백인 관람객들이 이민자로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했던 도산 안창호 가족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이 각각 해군과 육군에 입대해 복무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한국계 안수산 여사가 미 해군 최초로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다는 건 당시 상황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국가안보국 (The 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도 암호분석가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안 여사의 기록을 미국 대통령 기념관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암호는 보안을 필요로 하는 내용의 주요 통신수단이다. ‘나바호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윈드 토커(Wind Talker)’가 떠올랐다. 원주민 암호병과 특수부대원의 암호를 사수하기 위한 갈등을 그린 영화였다. 그때는 그 암호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일본군의 암호해독력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군이 원주민의 언어로 절대 해독할 수 없는 코드를 만들어 냈다는 참전군인의 증언과 기록은 매우 흥미로웠다.   원주민 말로 besh-lo(iron fish)는 ‘잠수함’을 뜻했으며 dah-he-tih-hi(hummingbird)는 ‘전투기’로 통했다. Po′sa taibo(Crazy White man)은 ‘히틀러’를 의미했다고 한다. 만약 원주민 암호병이 적에게 포로가 되면 그 암호를 파기하고 새로 암호를 만들었다 하니 암호는 전쟁의 승패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밖에 음료수 환타가 탄생하게 된 비화, 브래지어 제작 회사가 만든 통신 비둘기용 옷, 적을 속이기 위한 위장술 등 갖가지 비화가 소개되었다. 전쟁 중에 원재료가 귀해지자 물자공급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기록에 한국전쟁이 떠올랐다. 그 전쟁 중에 미군들을 통해 얻은 밀가루로 피란민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있었는데 그건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 따위의 부식들로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었던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인들의 가슴 아픈 전쟁 비밀이다.   대통령이 일하던 집무실을 지나 낸시 여사에게 보냈던 편지를 둘러보고 전용기 공군 1호기(Air Force One)에 올랐다. 그가 평범한 시절을 거쳐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어느 부분은 부족했고 어느 시간은 충분했으리라.   전시판에 적힌 “안전한 삶만 추구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안수산 여사의 고백처럼 나도 고난을 기회로 여기기로 했다. 권소희 / 소설가이 아침에 세계대전 비밀 안수산 여사 원주민 암호병 암호해독력 때문

2022-10-04

최장기 70년 재위한 영국의 정신적 지주

70년 재위 내내 영국은 물론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8일(현지시간) 별세했다. 96세. 영국 왕실은 여왕이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영국의 상징,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국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현대사의 주요 인물이다.   ▶2차대전 후 격동기 국민 통합   1926년 4월21일 태어난 여왕은 1952년 2월 6일 25세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인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예상보다 빨리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게 됐다. 여왕의 재위 기간은 70년 214일로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63년 216일)을 훌쩍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길다. 세계적으로도 루이 14세 프랑스 국왕(72년 110일) 다음으로 두번째다.   영국 여왕은 영국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까지 15개국의 군주이자 53개국이 참여한 영연방(Commonwealth)의 수장이고 신앙의 수호자이자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다.   윈스턴 처칠부터 리즈 트러스까지 영국 총리 15명을 거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격동기에 영국민을 통합하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대부분 영국인에게 여왕은 태어났을 때부터 늘 변함 없이 존재하는 바위같은 존재로, 영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영국 군주의 역할을 균형있게 해내고 개인보다는 공적 역할을 앞세우고 근면성실한 모습이 오랫동안 국민 지지를 받은 주요 동력이다.   ▶15개국 군주·영연방의 수장   여왕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부상과 식민지의 독립으로 대영제국의 위상이 무너지는 위기에서 영연방을 유지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해 영국의 영향력을 지켰다.   여왕은 1953년 대관식을 치른 뒤 바로 6개월간 영연방 순방에 나서 결속을 다졌다.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 왕으로서 첫 방문이었고 인도도 50년 만에 찾았다.   영국은 인구 6700만명의 섬나라지만 영연방은 약 25억명으로 세계 인구의 30%에 달한다.   여왕은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재위기간 미국 대통령 14명 중 13명을 만나고 중국 등 세계 100여개국을 방문하는 등 외교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99년엔 한국을 찾아서 안동 하회마을 등에서 생일상을 받았고 김대중·노무현·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21세기 새로운 군주제 모델   여왕은 왕실 무용론이 퍼지지 않고 21세기에도 군주제가 유지되도록 지켜냈다.   사실상 여왕 개인의 인기로 막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왕은 여론조사에서 늘 압도적 1등을 기록했다.   2021년 3월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의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영국인 59%는 왕실이 영국을 전통 있는 나라로 보이게 한다고 답했고 28%는 강해 보이게 한다고 했다. 왕실로 인해 불평등한 사회로 보인다는 답은 19%에 그쳤다.   여왕은 1953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치른 장엄한 대관식은 사상 처음으로 TV로 생중계됐는데 2700만명이 지켜봤다.   이는 전후 내핍을 견디며 제국의 영화가 사그라드는 것을 목도하던 영국인에게 자부심을 주고 대외적으로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냈다고 평가받았다.   품위있게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100세가 가까운 고령에도 호기심 가득하고 유머 있는 모습도 계속 사랑을 받았다. 무거운 자리이지만 여왕은 평생 그 역할을 즐겼다.   여왕은 1957년 TV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시작하고 유튜브와 SNS도 일찍 도입하는 등 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개회식 영상에 ‘본드걸’로 출연했고 코로나19 때는 대국민 담화 메시지로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영국 최장기 빅토리아 여왕 사실상 여왕 세계대전 이후

2022-09-08

[문화 산책] 예술로 승화된 아픈 기억들

내가 영화 ‘사코와 반제티’를 처음 감상한 것은 50년 가까이 전인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오랜 옛날 일인데도,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새내기 극작가였던 내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 모양이다.   ‘사코와 반제티’는 100여년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가난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마녀재판’이며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엄청난 국제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특히 이민자들에게는 이야기하는 바가 큰 영화다. 사건을 간추리면 이렇다.   1920년 4월 매사추세츠 보스턴 근교의 한 구두 공장에서 경리담당 직원과 경비원이 총에 맞아 죽고, 현금 1만6000달러가 털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뒤 이탈리아 이민자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사코는 구두수선공이었고, 반제티는 생선장수로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이민자였다.   경찰은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음에도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갔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이고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한 무정부주의자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당시 미국 사회는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심각한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과격해진 노사분규,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가 일어나자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여기에 무고한 사코와 반제티가 걸려든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재판은 ‘사상재판’의 성격을 띠며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두 사람은 재판 내내 결백을 주장했고 증인도 있었고 제3자가 범행을 자백하기도 했으나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21년 7월14일 두 사람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자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편견과 적개심에 근거한 불공정한 재판에 분노하는 항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파리에서는 미국 대사의 집이 파괴되고 구명운동을 벌이던 시위대에 폭탄이 터져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버트런드 러셀, 아인슈타인, 시인 아나톨 프랑스, 마리 퀴리, 이사도라 덩컨 등 세계 지성인들도 ‘최악의 사법살인’이라고 항의하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러자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사형 집행을 연기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내린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927년 8월23일 두 사람은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맞았다. 두 사람은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제공된 스프와 고기, 토스트, 차 등으로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당당하게 죽었다. 처형 당시 사코는 33세, 반제티는 36세였다. 사형집행으로 엄청난 항의가 뒤따라 파리, 런던 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사형 당한 지  30여년이나 지난 1959년 진짜 범인이 나타나자 그제야 진실이 밝혀지고 이들에게 사면이 제안됐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뒤인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를 확인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데 50년이나 걸린 것이다.   4·29 30주년을 맞으며 미술, 문학 등의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이민자와 디아스포라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사건과 영화 장면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편견과 의혹이 가져온 폭력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치유의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그림과 노래로도 명예가 회복됐다. 미국화가 벤 샨이 그린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 시리즈 23점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겪은 4·29 아픔도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예술 승화 매사추세츠 주지사 세계대전 참전 매사추세츠 보스턴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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