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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할리우드 한류의 선구자 오순택 선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세요.”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등 8관왕을 수상한 이성진 감독의 말이다. 데뷔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국계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의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싹쓸이하는 통쾌한 장면을 보면서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그것도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미나리’ ‘오징어게임’ ‘기생충’에 이어 ‘성난 사람들’ ‘전생’ 등으로 계속되니, 그야말로 할리우드가 우리의 앞마당이 된 듯한 느낌이다. 격세지감이 든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현실을 대하면서 나는 배우 고 오순택(1932-2018) 선생을 떠올린다. 한평생 그렇게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기뻐하고 있으시려나…. 오늘날의 영광이 있기까지 필립 안, 오순택 같은 선구자들의 외롭고 힘겨운 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배우 오순택은 명실공히 최초의 한류스타 연기자이다. 지난 2018년 4월 오순택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NYT)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어, 그의 삶을 조명하고 평가했다. 그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우 오순택은 아시아계 배우들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40여년간 영화와 TV에서 꾸준히 활동했고… (줄임)… 고인의 도전이 할리우드를 문화적으로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런 성취가 한층 빛나는 까닭은 투철한 예술가 정신과 투쟁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는 유럽 영화계와는 달리 오랫동안 외국인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백인우월주의의 둑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아시아계나 한국계 연기자가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순택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배우로 생활한다는 것은 산에서 고래를 찾고 바다에서 호랑이를 찾는 일과도 같다.”   나는 운이 좋아서 배우 오순택 선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차별과 싸우며 활동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인기나 성공보다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다.   예를 들면, 대중들에게 빨리 쉽게 기억되려면 영어식 예명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한국 이름 ‘Soon-Tek Oh’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안을 비하하는 배역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맡지 않는 등 한국인 배우로서 자존심을 지켰다. 그 당시 할리우드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시안의 역할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멋진 배역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배역을 골라서 맡는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순택은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오순택 선생이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이 자신처럼 험한 가시밭길을 걷지 않도록 돕고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이고, ‘한미극협’ ‘전통연기자협회’ 같은 극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후배를 양성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말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에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후배들에게, 그가 경험했던 어려움과 아픔을 겪지 않도록,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교육에 힘썼다. 발판 다지기에 헌신한 것이다.   한류 열풍이 어느 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류의 모든 분야에 고마운 선구자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있다. 그런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오늘의 한류를 한층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할리우드 할리우드 한류 오순택 선생 선구자 오순택

2024-02-01

"워싱턴서 영면한 한국항공우주공학 선구자"

1970년대 국산 미사일 로켓 백곰 개발을 이끌었던 한국 항공우주공학계의 선구자 홍용식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명예교수의 추모식이 지난 주말 버지니아 비엔나에 위치한 한미과학기술자센터에서 엄수됐다.   고인은  지난달  24일 워싱턴 자택에서 영면했다. 향년90세. 추모식에는 2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쟁 직후인 1955년 미국으로 이민와 일리노이대에서 기계공학 석사, 워싱턴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보잉사 등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다 197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미사일 개발과 과학자 유치에 호응해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에 부소장을 역임하였다. 고인이 개발에 참여했던 미사일은 1978년 9월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발사에 성공한 백곰 미사일이다. 현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관했으며, 사거리 200㎞를 날았다. 당시 세계 7번째 지대지 탄도 미사일 개발이었다. 백곰 미사일은 이후 연구가 이어져 오늘날 현무 미사일로 진화했다.   고인은 한국항공기술연구소를 이끌면서 한국의 항공기산업 육성방안을 마련, 여러 차례 정부에 건의하는 한편 고부가가치 항공기술에 단계적으로 도전, 젊은 연구원들과 창공 1호,2호,3호 등 초경량 항공기를 독자 설계하고 개발하여 규모는 작지만 완제기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실용 시제기인 창공 - 91호 (5 인승 경비행기)를 개발, 국내 최초로 교통부의 형식증명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후,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후배 양성에 힘쓰다 1998년에 정년퇴임하였다.   김옥채 기자 kimokchae04@gmail.com한국항공우주공학 워싱턴 미사일 개발 선구자 홍용식 워싱턴 자택

2022-02-14

"미군부대 매점 이용권으로 이중섭 작품 구입"

LA카운티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LA카운티미술관(LACMA)에 평생 수집한 한국 미술품 1000여 점을 아들과 함께 기증하는 체스터 장 박사와 그의 소장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장 박사는 최근 본지에 한국 근대 미술사의 대표적인 화가 이중섭과 박수근의 작품은 물론 한국의 고미술품을 LACMA에 기증하기로 지난 3월 서약했다고 밝혔다.       장 박사가 기증하는 한국 미술품 규모는 미국 내 미술관으로는 최대 규모다.         장 박사가 14일 공개한 소장품을 보면 그림 작품 외에 도자기, 조각품 외에 자개 등 공예품까지 다양하다. 또 중국, 일본, 티베트, 베트남 등 해외를 여행하며 수집한 작품들도 30여 점 포함돼 있다.         고미술품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후기 작품까지 있으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전쟁 시절 제작된 한국 근대 작품도 다수 있다.       장 박사에 따르면 고미술품은 외증조부와 어머니(고 민병윤)로부터 대부분 물려받았으며, 한국 근대 작품은 장 박사가 1970년대 초 대한항공의 미주 취항을 돕기위해 연방 항공청(FAA)교관으로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틈틈이 수집했다.       또 북한 작품의 경우 워싱턴DC 등에서 열린 비공개 전시회 등을 통해 샀다고 밝혔다.         아버지(고 장지환)가 외교관이었다는 장 박사는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때 한국 미술품을 이용해 분위기를 꾸미고 대화를 이어갔다”며 “그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좋은 작품은 구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한국 근대 작품 구입 배경에 대해서도 “당시 한국의 화가들은 가난했고 작품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림을 그릴 도구도 부족해 미군에서 나오는 두꺼운 박스 종이에다 그림을 그렸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한 예로 이중섭의 '소년과 소’를 보여주며 당시 미술 도구와 물감이 없어 올리브 오일과 미군 차량 기름을 이용해 박스에다 그렸다고 설명했다.         1948년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온 장 박사는 경기고등학교와 LA고교를 졸업한 후 USC 교육학 석사와 오클라호마대 인간관계학 석사, 라번대 행정학 박사 등을 거쳤다.         롱비치 스튜어드 데이비스 항공사에서 근무하다 연방항공청(FAA) 지명검열관을 거쳐 서부지역 운항담당 매니저로 42년간 근무했다.       1만 시간이 넘는 비행 기록이 있으며 지난 2015년에는 한인으로는 처음 ‘라이트형제 마스터 파일럿 어워드’를 수상했다. FAA에서 수여하는 이 상은 항공계에서는 최고 명예로 꼽힌다.       2003년부터 LACMA 이사로 활동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하와이대 한국연구센터에 100여 점의 한국 미술품을 기증했다. 또 USC와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등에도 다양한 작품을 기증해왔다.       한편 LACMA는 장 박사가 기증한 한국 미술품을 전시하는 특별 전시회를 빠르면 올해 말 마련할 예정이다. 또한 새로 문을 여는 LACMA에는 ‘체스터 장 전시관’으로 명명한 상설 전시관도 마련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장연화 기자     체스터 소장품 박수근 와이키키 서양화 선구자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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