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마지막 달력
마지막 달력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젠 바람이, 흔들리는 갈대가, 늦은 밤 별들이 노래할 겁니다 잠들은 당신 머리맡에 한 웅큼 꽃잎을 뿌리고서 짓 푸른 옥색 새벽으로 깨어날 겁니다 아프고 무너져도 이대로 가겠습니다 뒤돌아 보지 않을 겁니다 이젠 바람에게, 흔들리는 갈대에게, 늦은 밤 별들에게 얼굴을 들겠습니다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나를 살아가도록 행복해지는 빈 들에 서겠습니다 작은 삶의 사유로 잠 못 이루는 밤 소유하기보다 비워감에 익숙해지며 모르고도 살고, 알고도 산다면 차라리 모름의 삶을 택하겠습니다 안다는 것은 때로 자유를 속박하지만 그 속박의 굴레를 벗어남은 오히려 모르고 살아감에 있기에 새벽으로 안겨 노을로 지는, 빈들의 아픔과 수고, 그 눈물과 함께 춤추는 갈대와 바람과 별들의 쏟아지는 빈들의 행복을 나누는 일 뿐 나의 몫은 여기까지 입니다 올해는 모두가 잔뜩 움츠린 어깨로 살아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연말에는 펜데믹 상황이 호전되어 훨씬 밝아진 연말 연시를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런 오미크론의 창궐로 온 도시가 다시 어둠 속에 빠지는 듯하다. 덤덤하게 마지막 달력을 바라본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뒤돌아볼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뒤돌아 본다는 의미는 지난 날을 살아가면서 후회할 만한 일들이나 마음에 자꾸 걸리는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되짚어 보자는 뜻 만은 아니다. 지난 날들을 통해 무슨 깨달음을 갖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사람들을 만나고, 말하고, 기뻐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모든 삶은 내가 그은 금 안에 존재하는 지극히 작은 세상이다. 불편하지 않으려고 그려놓은 테두리, 내가 경험한 얄팍한 지식 그 안에 금을 긋고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니 나를 너무 몰아가지 않아도 된다. 모름을 줄이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자는 말이다. 우리는 모르고도 잘 살아왔고 이만큼 살고서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쏟아지는 햇살 가슴을 채우고도 넘쳐 어찌 다 감당할까 뒷모습까지 숨기지 못하는 벌거숭이 되어 마주한다 나도 너를 닮고 싶다 “괜찮아, 고개 숙이지 마!“ “12월의 햇살을 받으며 걷는 건 행복이야, 이건 축복이야!” 당신의 옷자락을 잡은 손 끝 쏟아지는 햇살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행복한 벌거숭이가 되고 싶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걷고 있다. 12월말 날씨가 이렇게 포근하면 시카고의 겨울은 겨울도 아니다. 첫 눈도 내리지 않았다. 하얀 도화지에 누렇게 시든 들풀의 유희가 그려진다. 아직도 푸른 소나무의 가지 끝 솔잎이 햇살을 더듬고, 굽은 등을 뉘운 채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언덕은 허리를 펴지 않는다. 지난 시간 내내 온갖 종류의 색들이 뒤엉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화려했던 언덕은 벌거숭이가 됐다. 수도 없는 벌 나비가 넘나 들었던 언덕, 새들의 놀이터였던 이 언덕은 지금 참으로 고요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진 당신의 옷자락 구석구석으로 햇빛이 쏟아진다. 형용할 수 없는 포근함이 밀려온다. 당신이 내린 옷자락을 잡은 손 끝으로 마지막 달력을 넘긴다. 모르는 날들을 향해 나는 또 걸어야 한다. 다 내어 주고도 행복한 빈 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조아린다. 아픔과 수고, 그 눈물 까지도 끊이지 않는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언덕. 나도 너를 닮고 싶다. 너를 닮은 행복한 벌거숭이가 되고 싶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달력 마지막 달력 옷자락 구석구석 언덕 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