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당신은 어떤 메일을 보내시나요
작가 류는 e메일을 보낼 때 완벽한 구조로 짜인 글을 쓴다. 형식에 흠이 없으면 수신자는 그것을 정보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브제로서 ‘감상’하게 된다. 단어와 문장 길이가 음률을 띠고 있고, 편지 속에서 시적 언어가 돌출해 이것을 받는 이는 갑자기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낀다. 그 이유는 첫째, 이 글을 쓴 사람이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내가 합치하는가. 둘째, 이 글에 부응할 만한 답신을 쓸 능력이 내게 있는가에 대해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보는 나와 내가 아는 자신의 자질은 종종 불일치한다. 평가절하된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테고, 그 반대도 많을 것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데, 나와 같은 부류는 상대가 실망하지 않게 답장을 공들여 써야 한다. 본모습보다 부풀려진 이미지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실제와 이미지의 간극을 좁히도록 동기 부여를 받기 때문이다. 나는 류의 메일을 받으면 보도자료나 칼럼보다 잘 써야겠다는 부담을 느껴 이야기가 뻔히 전개되지 않도록 근간을 되짚다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러곤 머릿속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고자 애쓰는데, 이 모든 행동은 고작 메일 한 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서 관계의 윤리성이 새롭게 솟아난다. 따라서 요즘 문자생활의 대세가 된 e메일, 휴대폰 메시지, 댓글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번역가 K의 메일에서는 단풍이 들거나, 구름이 흘러가거나, 비가 내린다. ‘좋은 봄날 되세요’ 정도가 안부의 대세인 요즘, 그의 메일은 주로 유럽의 예술과 사조의 숲길을 걷다가, 곁길로 나는 오솔길에서는 그 자신의 욕망 쇠퇴, 삐걱거리는 마음, 젊은이를 향한 애정 등을 내비친다. 그가 주로 먹는 음식은 두부이고 그걸 사러 자전거 타고 마트에 다녀온다는 얘기도 듣는데, 한 편의 스냅숏 같다. 그는 일상을 감각적으로 환기하는 능력을 지녔는데, 이런 이들은 편지함을 별도로 만들게 된다. 한편 이런 부류도 있다. 둘 사이에 생성되는 사적 언어들을 끊임없이 공문서 문장으로 되돌리는 사람. 김과 나는 일로 만난 사이가 아니어서 친구처럼 문자를 주고받아도 문제없다. 하지만 그는 회사 임원이고 조직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사적인 문자도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쓰듯 한다. 그런 문장에 맞닥뜨리면 난 경직된 언어를 이완시키려 노력하는데, 한두 달 뒤 연락할 때 어투는 원위치 되어 있다. 관계에서 겪는 언어적 좌절감은 사고의 정지를 가져오고,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다. 물론 사적인 언어, 친근감 있는 언어가 꼭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우정을 참된 공동체의 개념과 연관시켰던 발터 벤야민은 평생 거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정교한 거리두기 전략을 취했는데, 편지나 대화에서도 사적인 문제를 엄격하게 회피해 친구 몇몇은 그 점을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벤야민의 수많은 편지는 마치 한 편의 논문을 쓰듯 하거나, 자신의 독서 목록과 그에 대한 감상을 심지어 패러디 기법까지 동원해 담는 의기충천한 내용이었다. 몇몇 지인은 메일과 함께 음악을 보내온다. 음악으로 문자를 대신하는 것은 꽤 괜찮다. 다른 감각의 매개를 통해 관계를 확장하고 너와 내가 동일한 취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이런 관계를 통해 한때나마 내가 전혀 듣지 않을 음악을 들었고, 그 가사나 곡조는 발신자와 단단히 결부돼 세월이 지나도 잘 잊히지 않는다. 반면 요즘 범람하는 이모티콘은 아무 느낌도 전달 못 할 때가 있다. 이모티콘은 반복 재생산되고, A에게서 받은 것을 B에게서도 받기에 고유한 느낌이 없는 데다, 고정된 이미지 속에서는 상대의 진짜 언어를 찾기 힘들며 긴 문자를 이미지로 땜빵하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물론 어떤 이모티콘은 정말 귀엽다). 우린 요즘 책이나 종이신문은 읽지 않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문자를 쓰고 읽는다. 나와 내 동료들도 업무 시간에 교정지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메일과 카톡과 메신저를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기도 한다. 이렇게 대량 생산된 문자들이 휴지통에 처박히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와 한때 철학하는 동료로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중 하이데거 철학이 전진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고 실력이 앞서나가 그들은 결국 갈림길에 선다. 만약 내가 잘 쓰인 문장을 보낸다면 상대도 뒤처지지 않는 속도로 부합하고자 자기 삶을 돌아볼 테고, 그걸 문장으로 잘 직조해낼 것이다. 편지를 쓰는 나는 자신을 포장한다. 하지만 그 포장 속에는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 그에 맞춰 변하려 하기에 절반은 진실이다. 때론 꾸밈과 치장이 먼저 오고 그 틀에 맞춰 현실도 변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폭주하는 문자의 세계에서 좀 더 그럴듯한 언어로 관계의 탁월함을 꿈꿔보는 건 어떨까.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기고 메일 e메일 휴대폰 사적 언어들 언어적 좌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