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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뒷모습’의 정치인

뒷모습은 한 사람의, 그러니까 한 인생의 요약본이다. 마치 난해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생애 한 챕터에서 물러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차마 다 해석할 수 없는 진실 한 토막을 남긴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한 바로 다음 날, 어떤 뒷모습과 마주쳤다. 사퇴 압력을 받던 바이든 대통령이 끝내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이야기. 분명 정치적인 판단이었겠지만, 그 이면에서 분투했을 그의 인간적 고뇌 쪽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사퇴 연설을 하는 오벌 오피스에는 가족사진이 즐비했다. 사퇴를 만류했다는 가족들. 그래서 후보직에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선 노회한 정치인의 단호함과 할아버지이자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미안함이 두루 읽혔다.   그의 뒷모습이 남긴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바이든의 뒷모습은 해리스의 앞모습이었다. 단단했던 ‘트럼프 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민주당의 대선 승리를 예상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정치인이 스스로 돌아서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바이든의 단호한 뒷모습은 치열하고 내밀한 인간적 고뇌가 정치인으로서의 욕망을 가까스로 눌러낸 결과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이든이 후보직에서 돌아서기로 한 바로 그 날, 국내에선 가수 김민기의 부고가 전해졌다. 스스로를 ‘뒷것’으로 부르며 일평생 뒷모습으로 남고자 했던 아티스트. 그가 남긴 ‘봉우리’라는 노래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높은 봉우리에서 스스로 내려가기로 결단한 바이든의 뒷모습은 미국 정치에 보기 드문 활력을 불어넣었다. 소속 정당이 위기에 빠지자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쏘고 스스로 돌아선 뒷모습의 정치인. 정치 이념을 떠나서 바이든은 이런 사실만으로도 훗날 꽤 넉넉한 평가를 받는 정치인으로 남을 것이다.   여든두 살 미국 정치인의 단호한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올라가려는 한국 정치 지도자들이 떠올라 문득 쓸쓸해졌다. 지금 여야는 ‘친윤 공방’과 ‘일극 체제’ 논란 속에 당 대표를 선출했거나 뽑을 예정이다. 정치 전면에 나서는 ‘앞모습’보다 때를 기다리는 ‘뒷모습’이 필요하다는 지적에도 기어이 당권 장악에 나선 이들이다.   그러나 어떤 나라의 명운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아는 뒷모습의 정치인들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뒷모습은 제 생애를 요약할 뿐이지만, 한 정치인의 뒷모습은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한다. 정강현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뒷모습 정치인 노회한 정치인 일평생 뒷모습 한국 정치

2024-08-07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나는 벼슬을 하지 않아 너희에게 남겨줄 게 없다. 오직 두 글자의 놀라운 부적을 줄 테니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아버지의 유배로 폐족의 집안이 되었지만 ,아들들에게 학문과 독서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다산 정약용의 편지,에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과 애틋한 사랑이 묻어있다. 다산은 자식들에겐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이자 올바른 길을 전하는 스승이었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칭찬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별처럼 빛나는 다윗이지만 자녀교육에서는 실패했다. 자식들은 근친상간을 하고, 형제끼리 죽이고, 아버지를 향해 반역하고, 아비의 여자까지 가로채려는 아들을 두었으니 어찌 자녀교육을 성공했다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은 아브라함, 모세와 비견되는 거성(巨星)이며, 그의 이미지는 선지자를 웃돌 정도이고, 그는 조상의 종교에 충실하며 선지자 앞에서 겸허했다. 그는 지용이 뛰어난 장군이며, 발군의 지도력과 정의 공정의 감각을 지닌 대정치가로 또 위대한 시인이며 음악가이며 로맨틱한 영웅이었다. 왕으로서 그는 여호수아가 약 2세기 전에 시작한 가나안 정복을 완전히 성취하여 조상이 꿈꾼 약속의 땅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적인 왕이라 일컬어지는 다윗의 생애 말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다윗 왕궁을 둘러싼 골육상쟁의 비극이 그의 말년을 어둡게 했다. 그것은 주로 이복 형제간에 연로한 다윗의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다윗 왕에게는 8명의 처와 열 명이 넘는 첩이 있어 그 아들 수는 성경에 기록된 것만도 17명에 달한다. 압살롬의 반역도 궁중의 문란에서 오는 왕자들의 반목과 갈등에서 싹튼 것이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부친에 대한 반역의 선두에 섰다. 즉 다윗의 장자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능욕했으므로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누이의 복수로 암논을 살해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아람의 그늘로 도망쳤다. 이것은 단순한 복수일 뿐만 아니라 장자인 그를 제거하여 왕위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3년 후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는 부친을 반역할 계획을 마음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압살롬은 특히 북부 지파 중의 베냐민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에서 다수의 젊은 자를 모으고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강한 젊은 자들로 편성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황급히 왕궁을 버리고 도주할 때이다. 얼마나 상황이 급했던지 맨발에 머리도 가다듬지 못한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장난 것 같았다. 그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다윗이 왕좌를 되찾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다윗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다.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온갖 저주의 욕설을 퍼부었다. 시므이가 보기에 다윗은 끝장난 인생이었던 것이다. 분기탱천한 아비새는 당장 시므이의 목을 치겠노라고 다윗의 허락을 구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먼저 노해야 할 당사자 다윗은 침착하게 아비새를 만류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단지 시므이의 행위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통해 자신을 꾸짖고 계심을 알았던 것이다. 압살롬 쿠데타의 원인 제공자는 따지고 보면 다윗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충복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여인이 아이를 갖자 아예 남편 우리아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아내로 삼아 버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였다. 다윗의 장자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한 뒤 나 몰라라 했다. 이에 격분한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이복형 암논을 죽여 여동생의 원한을 갚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버지의 왕좌를 찬탈키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고 덤벼든 것이다. 계속 이어진 이 패륜적 사건들은 모두 자식들이 아버지 다윗에게서 배운 대로 한 짓들이었다. 누구를 탓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은 가신들에게 자식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패전을 하게 된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다가 큰 나무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슬피 울었다. 그동안 겪었던 고통은 그동안 아들을 거부하며 굳어졌던 그의 마음을 이처럼 애끓는 비탄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반역한 아들 때문에 다윗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보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다윗은 홀로  문 위층에 올라가서 통곡했다. 그것은 마셔야 할 쓴 잔이었다. 그토록 많은 축복을 경험했고, 그토록 풍성한 기쁨을 누렸던 다윗,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표현하는 관용구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만들어 냈으며, 세상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복 주심을 '구원의 잔'을 높이 들며 건배했던 다윗, 그는 그 쓴 잔 앞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이른 말이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뜨면 그것은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부모의 주검은 산에 묻고 자식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다. 육친을 잃은 아픔이 인륜의 고통이라면 자식 잃은 아픔은 동물적 본능의 슬픔이다. 참척의 고통은 눈을 감을 때까지 부모 가슴에 납덩이로 얹혀 있고, 세월이 흘러도 딱지가 앉지 않는 상처다.   다윗은 늙고 연약해졌다. 열왕기상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 이 구절은 다윗의 삶도 어쩔 수 없이 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 그 일생이 가장 잘 기록된 사람 중의 한 사람, 다윗의 삶도 드디어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구절의 뒷부분은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지라.” 신하들은 다윗 왕의 잠자리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왕이 밤에 품고 잘 수 있는 처녀를 구해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았다. 다윗의 마지막 인생 매듭을 보여주는 이 처신으로 인해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될 수 있었다. 말년의 다윗은 더 이상 예전의 다윗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의 미색을 보고서도 동요치 않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삶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극적인 상황을 다 거쳤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듯이 그의 인생은 극에서 극으로 왔다 갔다 하며 근심과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다윗의 삶은 산 정상과 골짜기, 그 양 극단을 왔다 갔다 하는 삶이었지만, 그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만났다. 간음에 살인마저 저질렀던 다윗이 자신의 일생을 진리 안에서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마침내 자신이 범한 죄악과 패륜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했다. 자녀교육에 실패한 다윗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전두환 전대통령 일가의 파탄적인 가족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의 손자는 친할아버지를 가리켜 ‘학살자’라고  매도했다. 할아버지를 ’학살자‘라니, 설령 할아버지가 대역죄를 지었다고 해도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내 탓’이라고 자책했다.. 전두환 일가의 비극을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우리에게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이다.  순조 7년(1807)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김병연은 6세 때 조부 김익순이 선천 부사로 있다가 홍경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투항한 것과 관련하여 폐족을 당한 후 전국을 전전하다 영월에 정착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게 되었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김병연은 20세 때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홍경래난 때, 순절한 가산 군수 정공의 충절을 찬양하고, 항복한 김익순을 논하라.’는 시험 제목의 향시에서 장원을 했다. 그는 일필휘지 붓을 휘둘러 추상같이 탄핵했다.“너의 혼은 죽어서도 저승에도 못갈 것이며,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것을 알게 되자  김병연은 조상을 욕되게 하여 하늘을 쳐다볼 수 없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생활을 하며 벼슬길을 포기했다. 그 후 김삿갓은 57세로 객사할 때까지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방랑 걸식했다. 지친 몸으로 말년에 들른 곳이 전라남도 화순이었는데, 그곳 명소 적벽에 매료되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기구한 삶을 마감했다. 그는 한평생을 두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운명의 사슬은 그로 하여금 집도 처자도 버리고 잘못된 제도의 멍에를 쓴 천형의 죄인인 양 시대의 그늘을 방황하게 만들었지만, 보라! 그는 마침내 시간과 공간의 올가미로도 붙잡을 수 없는 초탈의 시선(詩仙)으로 우뚝 섰다. 예로부터 가정이 행복해야 나라가 잘되고 평화롭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할아버지로서 과연 나는 바로 섰는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김지민 기자뒷모습 부모 아버지 다윗 다윗 하나님 다윗 왕궁

2023-04-13

[열린 광장] 뒷모습에 담긴 세월의 흔적

‘여보 사랑해요’ ‘아버지 천국에서 만나요’ ‘천국에서 안식하소서’ 얼마 전 참석했던 장례식장은 고인을 추모하는 글귀가 담긴 꽃들로 가득했다. 그 꽃들 사이에 온화한 표정의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동료 목사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잃은 동료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조문객으로 참석한 장례식이 영 어색했다. 목사이기에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을 찾기보다는 집례나 다른 순서를 맡을 때가 많았다.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하기에 장례식 내내 긴장하며 서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조문객으로 참석한 장례식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두리번대던 눈길이 장례식장 전면에 붙어 있는 큼지막한 TV에 멈춰 섰다. 찬송가 악보도 보여주고, 고인이 살아계실 때의 행적이 담긴 슬라이드 쇼도 나오는 TV였다.  TV 화면은 집례자와 함께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맨 앞줄에 앉은 유가족이 울음을 애써 참느라 들썩대는 어깨의 흔들림이 TV 화면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유가족들 바로 뒷줄에 앉아 있는 조문객들의 뒷모습도 TV로 보였다. 그중에 한 중년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사내의 뒤통수가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그것도 내가 고개를 돌리는 대로 따라다녔다. ‘설마 저게 나겠어?’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데, 그 사내의 머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까딱거렸다.     내 뒤통수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인지 TV 화면에 비친 내 뒤통수가 낯설기만 했다. 저게 남들이 보는 내 뒷모습일 텐데 나만 못 보고 살아왔다는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TV 화면으로 보이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내 뒤통수에는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가만 보니 내 머리만 하얀 것이 아니었다. 내 앞에 앉은 이의 머리도 하얗고, 그 옆에 있는 이의 머리는 가운데가 횅했다. 앞모습만 바라보느라 놓쳐버린 세월의 흔적이 오랜만에 만나는 뒷모습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것은 뒷모습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걸어왔던 길에도 그 흔적이 쌓여 있을 것이다. TV 화면을 통해 비치는 뒷모습을 보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생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날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을 떠나는 동료 목사의 아버지도 결국은 뒷모습만을 남기고 갔다. 아내에게는 자상한 남편이요, 아들들에게는 하늘 같은 아버지였다.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따듯한 할아버지였고,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보인 신앙인이었다. 그가 남긴 뒷모습이 멋지고, 그가 걸어왔던 길이 아름다웠던 만큼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이 더 아쉬웠을 것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이 남을 뿐이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만난 내 뒤통수를 보면서 이제는 뒷모습을 잘 관리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길을 걸어갈 때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야 할 때다. 내가 밟고 지나온 길이 누군가에게는 따라가야 할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TV 화면에 비친 한 중년 사내의 뒤통수는 세월의 흔적을 잘 쌓으며 살라고 하면서 오늘도 하얗게 변해간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 광장 뒷모습 세월 장례식장 전면 그날 장례식장 아버지 천국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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