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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섬강에 노을이 지면

엄마가 사는 강원도 횡성에는 섬강이 흐른다. 둑길을 따라 올라가면 월천(月川)이 있고 그 강가에 두꺼비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는데, 그 모습을 따서 두꺼비 섬(蟾) 섬강이라 불린다니 이름도 예쁘다. 자연이 좋아지면 나이가 든 거라 하던데 세월은 깊이를 더하고 마음의 눈은 순해진 탓일까. 이토록 절절히 자연이 가슴에 스며들 줄이야.     병풍 같은 산새에 둘러싸인 도시, 횡성은 수려하다. 거기에다 매일 눈을 뜨면 느린 황소걸음처럼 기지개하는 태양과 그렁그렁 물소리를 들으며 사는 이곳 농촌 사람들의 순수와 인간미의 아름다움을 말해서 무엇하랴. 이 작은 도시에는 시(詩)를 공부하는 문학 교실이 있다. 엄마는 이 문학반의 학생이고 나는 엄마의 수업에 하루 방문객으로 참가했다. 깨끗하게 정돈된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창동 감독 영화 시(詩)가 연상되었다. 창가 빛에 반사되는 희끗희끗 빛나는 은물결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초로의 학생들,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하고 뭉클하여 나는 가만가만 숨소리를 조절해야만 했다.     이 시골의 아름다운 분들은 왜 이곳에 앉아 모든 시작과 끝을 허투루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눈동자로 언어의 밭갈이에 열중하는가?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내면서 설명이 잘 안 되는 그런 지점에서의 사유의 폭을 넓혀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몸짓일까, 밥벌이와 상관없는 놀이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네모난 책상과 전쟁을 치르며 내재적 귀족 그 눈부신 왕관을 꿈꾸는 자들이 시를 공부하는 이분들이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칠판에는 ‘박순남 시인 따님, 고국 방문 환영!!’이라고 쓰인 글씨와 환영식의 꽃다발, 박수 소리!! 먼 곳으로 시집간 딸의 부재를 채워주시어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문학과 엄마의 문우, 그분들께 감사하여 그날의 수업은 시의 강물로 넘쳐흘렀다. 준비해온 자료가 넘치도록 열정적인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와인 잔을 높이 올리며 다시 한번 축하의 파티를 이어갔다. ―그날이 이렇게 눈에 아련한데 87세 엄마를 고국 땅에 남겨두고 나는 벌써 뉴욕에 도착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들은 가곡을 부르고 하모니카를 불며 시를 쓰는 엄마의 왕성한 삶의 열정에 혀를 내두르며 엄마의 건강이 염려 없다 하지만 돌아가는 굴렁쇠를 놓으면 멈추리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굴렁쇠를 돌리는 엄마의 힘겨운 손짓을 나는 알고 있다.     어젯밤 전화를 하니 엄마는 써놓은 시를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영화광인 내가 올해에 본 최고의 영화 노마드랜드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 그 시가 엄마의 얼굴에 오버랩 되었다.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아니, 그대는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중략)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그러나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에 혹은 자연의 계획된 이치 때문이건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은 시들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 속을 헤맨다고 자랑하지 못하리라/ 그대는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인간이 숨을 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깐 빌려 살고 가는 이방인이고 순례자이고 길 위에 노마드이다.     언젠가는 엄마의 여행이 끝나고 섬강에 노을은 질 것이다. 섬강에 노을이 지면 출렁이는 물결 속에 당신의 시 같은 맑은 웃음소리 물풀에 흔들릴 것이다. 곽애리 / 시인삶의 뜨락에서 섬강 노을 시가 엄마 영화 노마드랜드 두꺼비 모양

20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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