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 아침에] 돌배나무

돌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돌배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5~16년 전의 일이다. 지붕공사를 하며 지붕과 처마에 가지를 드리우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막상 나무들을 제거하고 나니 빈공간이 허전하고 그늘도 사라져 나무를 한그루 심기로 했다. 나무를 사려고 하니 생각보다 비쌌다. 어린 나무를 심어 몇 년 키우면 되지 싶어 홈디포에서 세일하는 나무를 사 왔다. 교우 S씨 부부의 도움을 받아 심고, 식수 기념으로 버팀목에 사인까지 했다.     제법 큰 키의 나무를 싸게 판 이유가 있었다. 키는 사람만 한데 줄기는 가늘어 바람이 불면 심하게 휘청거리는 것이었다. 몇 해가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 앞마당 공사를 하며 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콘크리트를 깔게 되었다. 나무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놈 뽑아버릴까 했는데, 그것도 생물이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네가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이 너의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거야.” (어린 왕자에 나오는 글이다.)     그동안 들인 공만큼 정도 들었다. 가드너에게 (나무 가격의 두 배가 넘는) 50달러를 주고 잔디밭 위로 옮겨 심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누군가 주변에 심을 박아 나무를 묶어 놓았다. 알고 보니 건너편 이웃이 바람에 쓰러진 나무를 세워놓은 것이다. 자세히 보니 줄기가 부러졌다. 아내가 테이프를 붙여 살려보려 했지만 결국 나무의 4/3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어찌 되나 두고 보자 하며 지냈는데, 부러진 줄기에서 가지가 새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가 나오고, 반대쪽에 두 개가 나오고, 그렇게 모양을 갖추어 갔다. 돌배나무가 보낸 힘든 세월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부러진 흉터가 보이지만, 남들에게는 의젓한 나무의 모습이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하얀 꽃을 피우며 봄이 멀지 않음을 알려 준다.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한번 맺은 인연을 줄기차게 잡고 간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이 좋기 때문이다. 만남은 인연의 시작일 뿐, 그 다음에는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심적·물적 희생과 투자가 따른다. 때로는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리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뿐 아니라 사물과도 인연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집이 그렇고, 차가 그렇고, 옷도 모두 시절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끼는 물건 중에는 십수 년 전에 선물 받은 휠체어 장갑이다. 비슷한 장갑을 여러 개 샀지만, 이것만큼 편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아끼며 사용해 지금도 쓰고 있다.   나이가 들며 아쉽고, 슬프고, 애처로운 것은 이런 인연들과 헤어지게 되는 일이다. ‘회자정리’며, ‘거자필반’이라 했지만, 나이 든 사람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이 아침에 돌배나무 나무 구실 나무 가격 모두 시절인연

2025-02-16

[이 아침에] 늦은 오후의 모놀로그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창밖으로 해가 길다.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스케줄이 없다. 내친김에 T.J.맥스도 갔고 한인 마켓에 가서 장도 한 보따리 보고 왔는데도 햇빛은 아직도 강렬하다.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잡고 TV를 켜니 새로운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고 전에 하던 드라마와 영화를 재방송하고 있다. 그렇다고 심심하다고 바쁜 친구에게 전화하기 망설여지는 오늘.     매일 오는 카톡도 조용해서, 꽃이나 나무 그림, 커피잔을 배경으로 한 “오늘도 행복하세요”, 아니면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주로 귓등으로 흘려듣고 보는 문자 메시지조차 그립다.     기온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하고 간간이 비도 몇 번 내리더니 집 앞에 있는 돌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봄에 하얀 눈송이 같은 꽃을 피우는 나무인데. 흡사 지난봄에 미처 개화하지 못한 꽃을 지금 피워대는 것 같았다. 나무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간직했다가 원할 때 꺼내서 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 속이 상하고 해결 방법이 없는 사건을 기억에서 꺼내 곱씹으려 했으나, 컨트롤할 수 없는 문제에 보내는 시간은 생산적이지 않아 아깝다. 차라리 이런 자투리 시간을 보자기에 고이 싸서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좋겠다.     짐 크로스가 부른 ‘Time in a bottle(병 속의 시간)’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만약 병 속에 시간을 모을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영원함이 지나갈 때까지 하루하루를 저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물처럼 아껴두었다가 당신과 함께 보내는 데 쓰고 싶습니다’. 시간을 모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쓰고 싶다는 소망. 지금 나는 이 가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세상만사가 내 손아귀에 있는 느낌이 들 때, 구름을 걷는 느낌이 들 때, 장미꽃 위에 맺힌 이슬을 볼 때, 아니면 시험을 볼 때, 마감 시간에 쫓길 때,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때, 소중히 보관한 시간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풀어서 쓸 수 있다면.   아니면, 우울할 때, 세상에서 시달릴 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잊히지 않는 상처가 올라올 때, 그런 시간을 꽁꽁 묶어 영원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에는 이런 글이 있다. ‘당신이 시간의 씨앗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곡식이 자랄지, 어떤 곡식이 나지 않을지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씨앗이라니. 역시 대가다. 그가 성큼 옆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어느덧 해는 잦아들고 있다. 잠자리가 나비보다 눈에 더 뜨이는 오늘. 나는 돌배나무 꽃잎 위에 앉아 있었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모놀로그 자투리 시간 마감 시간 돌배나무 꽃잎

2023-10-03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