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이 아침에] 늦은 오후의 모놀로그

이리나 수필가

이리나 수필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창밖으로 해가 길다.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스케줄이 없다. 내친김에 T.J.맥스도 갔고 한인 마켓에 가서 장도 한 보따리 보고 왔는데도 햇빛은 아직도 강렬하다.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잡고 TV를 켜니 새로운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고 전에 하던 드라마와 영화를 재방송하고 있다. 그렇다고 심심하다고 바쁜 친구에게 전화하기 망설여지는 오늘.  
 
매일 오는 카톡도 조용해서, 꽃이나 나무 그림, 커피잔을 배경으로 한 “오늘도 행복하세요”, 아니면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주로 귓등으로 흘려듣고 보는 문자 메시지조차 그립다.  
 
기온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하고 간간이 비도 몇 번 내리더니 집 앞에 있는 돌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봄에 하얀 눈송이 같은 꽃을 피우는 나무인데. 흡사 지난봄에 미처 개화하지 못한 꽃을 지금 피워대는 것 같았다. 나무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간직했다가 원할 때 꺼내서 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 속이 상하고 해결 방법이 없는 사건을 기억에서 꺼내 곱씹으려 했으나, 컨트롤할 수 없는 문제에 보내는 시간은 생산적이지 않아 아깝다. 차라리 이런 자투리 시간을 보자기에 고이 싸서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좋겠다.  
 


짐 크로스가 부른 ‘Time in a bottle(병 속의 시간)’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만약 병 속에 시간을 모을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영원함이 지나갈 때까지 하루하루를 저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물처럼 아껴두었다가 당신과 함께 보내는 데 쓰고 싶습니다’. 시간을 모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쓰고 싶다는 소망. 지금 나는 이 가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세상만사가 내 손아귀에 있는 느낌이 들 때, 구름을 걷는 느낌이 들 때, 장미꽃 위에 맺힌 이슬을 볼 때, 아니면 시험을 볼 때, 마감 시간에 쫓길 때,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때, 소중히 보관한 시간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풀어서 쓸 수 있다면.
 
아니면, 우울할 때, 세상에서 시달릴 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잊히지 않는 상처가 올라올 때, 그런 시간을 꽁꽁 묶어 영원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던져 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에는 이런 글이 있다. ‘당신이 시간의 씨앗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곡식이 자랄지, 어떤 곡식이 나지 않을지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씨앗이라니. 역시 대가다. 그가 성큼 옆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어느덧 해는 잦아들고 있다. 잠자리가 나비보다 눈에 더 뜨이는 오늘. 나는 돌배나무 꽃잎 위에 앉아 있었다.

이리나 / 수필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