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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존재하는 것들의 슬픔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고독만큼 같이 지내기에 좋은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대개 방 안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외롭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항상 혼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 중에서   소로는호수의 아비새와 휠튼 호수가 외롭지 않듯 스스로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목장에 핀 한 송이 현삼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그리고 뒤영벌이 외롭지 않듯’ 자신도 외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수시로 생의 뒷덜미 치는 허무와 허리뼈 뭉개고 달아나는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생명 있는 것들은 아프다. 태양도 달도 별도 생명 없는 것들도 슬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외로움의 깃발을 생의 곳곳에 꽂는다. 고목도 강물도 비오는 날이면 슬픔의 눈물 흘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슬프다. 세월이 담쟁이 넝쿨로 온몸을 휘감으며 생채기를 남기는 동안 사랑을 하고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대 품속에 있을 때도, 그대 떠난 창가에 홀로 서 있을 때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람을 견디지 못해 세월이 조금씩 바위에 흠집을 내는 동안, 그대 향한 사랑의 꽃다발도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마른 꽃잎으로 시들어갔다.     고독은 혼자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 고독은 영어로 ‘Solitude’로 번역되는데 바른 표기는 못 된다. Solitude 는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배제된 혼자 있는 상태로 명상이나 창작, 수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독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슬픔이다. 소중한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그려져 있지 않다. 고독은 인생의 여백이다. 보이지 않는 생의 슬픔을 담는다.     여백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외로워도 혼자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여백은 비어있는 것들을 채워주고 슬픔을 잠재운다. 공백이 생략된 공간이나 단순히 비어있음을 뜻한 데 비해 여백은 공백이 주는 공간적 빈자리를 극복하고 고독을 견디는 새로운 장을 펼친다.   고독은 창의성의 원천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고독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창조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말한다. 수많은 위인이나 예술가들은 고독의 강을 건너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도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고독을 통해 가지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고독은 ‘나 하나로, 나 혼자’라도 충분해지는 생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개나리 세 그루를 뒷마당에 심는다. 사랑 듬뿍 주면 밝고 샛노란 꽃잎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환한 미소로 다가올 것이다. 코발트빛 봄 하늘을 병풍 삼아 봄노래 중얼거릴지 모른다. 외롭지 않기로 했다, 더 사랑하고 껴안고 가까이 가기로 한다. 고독은 외로움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슬픔이라 해도 고독을 위해 생의 몇 부분을 남겨 놓는다.     고독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동행자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프다 해도 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크고 우람한 붓질을 남겨두리라. 그대 사랑이 지나간 여백의 화선지에 사랑의 꽃 한 송이 새겨두기로 한다.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존재 슬픔 동안 사랑 그대 사랑 담쟁이 넝쿨로

2023-04-16

[이 아침에] 어머니의 양귀비꽃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어머니날을 맞은 주일에는 교회에서 성가대의 특송으로 늘 듣는 곡이다. 우리는 머리를 약간 숙이고 울울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듣는다. 누군가가 들릴 듯 말 듯 따라 부르는 소리를 시작으로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림 같은 소리가 들린다. 우물우물 씹다가 삼켜 드는 소리. 혹은 톤을 지니지 못한 울렁거리는 소리. 끝내 다 부르지 못하고 참다 참다 터져 나오는 마디를 갖추지 못한 흐느낌 같은 소리.     성가대의 합창에 맨 처음 따라 부른 이는 아직 살아 계신 어머니를 둔 자식이기 쉽다. 이미  어머니를 여윈 자식은 쉽게 목이 소리를 밀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슬아슬하게 살아 계실 때는 이러다 나중에 후회하지 싶은 일도 결국 만들고 만다. 세상의 자식들은 절대 효자도, 절대 불효자도 없는 것 같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속울음을 안 울어 본 자식이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절대 효자였다면 보내드리고 후회할 일 없을 것이고, 절대 불효자였다면 이 역시 보내드리고 울 일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태에서 나온 한 지체이니 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신앙이다.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는 절대적인 신앙.   지난해 늦가을 담벼락 담쟁이 이파리들이 꼬장꼬장 말라갈 즈음 어머니를 양로병원으로 옮겨드렸다. 담쟁이 잎은 마를 대로 말라 추레한 몰골을 하고 곧 떨어질 듯 간들간들하면서도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강한 생명력을 연민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아침에 눈이 뜨이는 대로 눈여겨 둔 담쟁이 잎부터 찾았고 그렇게라도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런 날은 어머니에게 가는 발길이 가볍다.   가을도 깊어 몇 차례 드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가 거칠수록 나는 담쟁이 잎이 걱정되었다. 나가 보자니 혹시 모를 그 허전함이 두려웠다.     이른 아침 부리나케 나가 본 담벼락에 그 잎은 자취가 없고 잎자루를 물고 있던 가지 사이에 움푹 파여 떨켜만 드러나 있었다. 마음이 내려 앉은 나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이틀 후에 낙엽처럼 가셨다.   담쟁이 잎의 한 생애는 봄, 여름 가을이지만 어머니의 한 생애는 98년이셨다. 지나고 보면 한 생애의 길이는 담쟁이 잎이나 어머니나 모두 같은 것이었다. 시공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소파 한쪽에 앉아서 빨래한 옷을 개키던 어머니가 안 보인다. 번번이 안 계실 줄 알면서 고개를 둘러본다. 한참 후 나는 조용히 엄마! 하고 불러 본다. 온 세상이 뿌옇다.   올해도 양귀비가 꽃망울을 올렸다. 해마다 5월이면 뒤뜰에서 어머니의 눈을 환하게 밝혔던 꽃.  낙하산 같이 펄럭거리는 주황색 양귀비꽃 한 다발을 꺾어 들고 나는 어머니에게 갈 것이다. 어머니는 전처럼 양귀비를 보고 환해질 것이고 내 손도 반갑게 잡으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많이 그리웠다고 말할 것이다. 조성환 / 수필가이 아침에 양귀비꽃 어머니 주황색 양귀비꽃 담쟁이 이파리들 절대 불효자

2022-05-09

[이 아침에] 어머니의 양귀비꽃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어머니날을 맞은 주일에는 교회에서 성가대의 특송으로 늘 듣는 곡이다. 우리는 머리를 약간 숙이고 울울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듣는다. 누군가가 들릴 듯 말 듯 따라 부르는 소리를 시작으로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림 같은 소리가 들린다. 우물우물 씹다가 삼켜 드는 소리. 혹은 톤을 지니지 못한 울렁거리는 소리. 끝내 다 부르지 못하고 참다 참다 터져 나오는 마디를 갖추지 못한 흐느낌 같은 소리.     성가대의 합창에 맨 처음 따라 부른 이는 아직 살아 계신 어머니를 둔 자식이기 쉽다. 이미  어머니를 여윈 자식은 쉽게 목이 소리를 밀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슬아슬하게 살아 계실 때는 이러다 나중에 후회하지 싶은 일도 결국 만들고 만다. 세상의 자식들은 절대 효자도, 절대 불효자도 없는 것 같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속울음을 안 울어 본 자식이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절대 효자였다면 보내드리고 후회할 일 없을 것이고, 절대 불효자였다면 이 역시 보내드리고 울 일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태에서 나온 한 지체이니 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신앙이다.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는 절대적인 신앙.   지난해 늦가을 담벼락 담쟁이 이파리들이 꼬장꼬장 말라갈 즈음 어머니를 양로병원으로 옮겨드렸다. 담쟁이 잎은 마를 대로 말라 추레한 몰골을 하고 곧 떨어질 듯 간들간들하면서도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강한 생명력을 연민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아침에 눈이 뜨이는 대로 눈여겨 둔 담쟁이 잎부터 찾았고 그렇게라도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런 날은 어머니에게 가는 발길이 가볍다.   가을도 깊어 몇 차례 드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가 거칠수록 나는 담쟁이 잎이 걱정되었다. 나가 보자니 혹시 모를 그 허전함이 두려웠다.     이른 아침 부리나케 나가 본 담벼락에 그 잎은 자취가 없고 잎자루를 물고 있던 가지 사이에 움푹 파여 떨켜만 드러나 있었다. 마음이 내려 앉은 나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이틀 후에 낙엽처럼 가셨다.    담쟁이 잎의 한 생애는 봄, 여름 가을이지만 어머니의 한 생애는 98년이셨다. 지나고 보면 한 생애의 길이는 담쟁이 잎이나 어머니나 모두 같은 것이었다. 시공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소파 한쪽에 앉아서 빨래한 옷을 개키던 어머니가 안 보인다. 번번이 안 계실 줄 알면서 고개를 둘러본다. 한참 후 나는 조용히 엄마! 하고 불러 본다. 온 세상이 뿌옇다.   올해도 양귀비가 꽃망울을 올렸다. 해마다 5월이면 뒤뜰에서 어머니의 눈을 환하게 밝혔던 꽃. 어머니날쯤에는 만개할 것이고, 낙하산 같이 펄럭거리는 주황색 양귀비꽃 한 다발을 꺾어 들고 나는 어머니에게 갈 것이다. 어머니는 전처럼 양귀비를 보고 환해질 것이고 내 손도 반갑게 잡으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많이 그리웠다고 말할 것이다.  조성환 / 수필가이 아침에 양귀비꽃 어머니 주황색 양귀비꽃 담쟁이 이파리들 절대 불효자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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