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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이 있다

어느 마을에 농부가 있었다. 마침,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다. 너무 기뻤던 농부는 아내에게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자"고 말했다. 몇 개월이 지나 송아지를 모두 장에 내다 팔려고 가는 길에 그만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져 죽고 말았다. 농부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 하필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조금은 치사한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우스개다. 그럼 "모든 것을 드린다"는 말은 어떤가. 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표현이 아닌가? 믿음의 대상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일과 이를 받은 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물을 가져가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신에게 비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신을 섬기는 방식인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제물이 필요할까? "내가 설령 배가 고프더라도 너희에게 달라고 말하겠느냐? 온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다 나의 것이다." (시편 50:10-12)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내보내서 제물 만들어 오라고 시키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왜 읽기도 어려운 제사 이야기를 성경에 적어놓았을까?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쪼개지고 태워지는 제물처럼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약속을 십자가에서 지키셨다.     우리는 갖다 바치면서 신을 섬기는 일에 익숙해 있다. 왜냐하면 두렵고 불안해서 우리가 만든 신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지닌 이들조차도 갖기 쉬운 오해는 우리에게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손으로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고 우리의 정성이라고 부른다. 아닌 것처럼 기도하면서도 봉사와 선교를 하나님 앞에 천국 가는 보험처럼 바친다.     격화소양이라는 말이 있다.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우리의 최고를 바치려는 모든 시도는 다름 아닌 격화소양이다. 시원할 리가 없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물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다. 주님께 나아오는 유일한 조건은 아픈 마음이요, 지친 어깨요, 자신의 연약을 보는 눈물이며 말조차 하기 힘든 탄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이유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 헌신도 함정 농부가 가슴 제사 이야기

2024-09-09

[사진의 기억] 모내기

지난주에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차창 밖으로 모내기를 앞둔 논마다 물이 찰랑거리는 풍경을 보았다. 예전에도 봄과 여름이 맞물리는 이 무렵이면 농촌에서는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느라 분주했었다. 바지를 둘둘 말아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모를 심는데 유난히 거머리가 많은 논에선 발끝부터 무릎까지 더 빈틈없이 중무장하곤 했다. 한번 살갗에 달라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맹렬하게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오죽하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는 표현이 생겼을까.   그러나 모내기 철에 찰거머리보다 더 무서운 게 가뭄이다. 긴 가뭄으로 논이 쩍쩍 갈라지는 바람에 모를 심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이웃 간에 서로 물꼬를 대려는 싸움이 빈번했다. 1년 농사의 성패를 가름하는 일이라서 사이좋던 이웃이라도 얼굴 붉히며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간밤에 비가 흡족하게 쏟아지면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어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농부의 마음을 농부가 알기에 서로 어제 일을 탓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계가 대신해주지만 70년대 농사는 거의 다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모내기가 한창일 때는 교실에 빈자리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모를 심는 동안 아이들은 잔심부름을 맡았다. 논에 새참을 내가는 일이나 막걸리 심부름은 아이들 몫이었다. 물론 아이들도 싫지 않았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는 참에 교실에 앉아 졸음을 참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고 더구나 새참을 얻어먹는 재미에 신이 나서 논두렁을 뛰어다녔다.   이제 막 점심을 배불리 먹고 논에 들어갈 시간, 마음이 다급한 농부의 아내가 먼저 들어가 모를 배분하는 중이고 논두렁에 선 남편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며 오늘 해치울 일을 가늠해보고 있다. 진흙투성이인 농부의 종아리 사이로 어느새 여름이 밀려오고 있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모내기 진흙투성이인 농부 농부가 알기 무릎 위로

2024-06-02

[삶의 향기] 그 많던 땅강아지는 어디로 갔나

서리가 내려서 땅콩 가을걷이를 서둘러야 한다며 함께 가자는 지인의 말에 경기도 여주로 나들이했다. 땅콩밭까지는 농로를 제법 걸어야 했다. 한 달 전까지 연노랑을 머금던 평야가 이제는 진노랑 즙을 삼킨 듯했다. 논두렁에선 들풀 마르는 냄새가 진하게 번졌다. 벼잎 위의 메뚜기, 강아지풀에 살포시 몸을 앉힌 고추잠자리를 보니 옛 기억이 불현듯 살아났다.   땅콩밭에 도착하니 하트 모양의 잎과 보라색 줄기를 가진 고구마도 바로 옆 뙈기밭에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땅콩밭 주인이 고구마와 땅콩은 옛날 배고팠던 시절 구황작물로 재배했는데, 뿌리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쉬운 모래땅에서 잘 자라 여주를 대표하는 작물이라 소개했다. 또 이 동네 밭은 친환경 농법 덕에 토양이 오염되지 않아 땅강아지도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땅콩 줄기를 당기자 아닌 게 아니라 땅강아지 서너 마리가 딸려 나온다. 딸려서 나온 땅강아지들은 눈이 부시다는 듯 앞발로 사레를 치며 몸을 좌우로 흔든다. 그중 한 마리를 집으니 예나 지금이나 미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땅(土)’속에 사는 ‘강아지(狗)’인 땅강아지(土狗)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바로 옆 고구마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땅강아지는 식물 뿌리를 먹어 속이 상하지만 땅을 파 산소를 공급하고 빗물도 잘 스며들게 하니 밉지는 않다고 했다. 또 힘이 세고 공격성이 강한 가물치나 뱀장어 낚시에는 땅강아지를 최고의 미끼로 친다고 한다. 아마도 땅강아지의 왕성한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길에 포장이 안 돼 온통 흙이었던 시절 아이들은 독이 없는 야행성 곤충인 땅강아지를 잡아서 장난감 삼아 놀았다. 어릴 적 평상에서 저녁을 먹을 때라면 땅강아지는 전등이 있는 평상 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좀 끼워줘’라는 듯 말이다. 이는 땅강아지에게 ‘빛을 쫓아가는’ 추광성(趨光性)이 있어서다. 그러던 땅강아지들이 모습을 감추게 된 건 급속한 도시화로 땅이 없어진 탓이다.   필자도 실의에 젖었던 어린 시절 땅강아지를 집어서 아래에서 위로 보기도 하고, 책상 위에 놓고 기어가는 모습도 봤다. 확대경으로도 관찰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땅강아지는 온몸이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다. 삽날처럼 생긴 종아리는 넓적하고 튼튼해 아주 듬직한 모습이었다.   땅강아지도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땅강아지의 검은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땅강아지와 교감하는 일이 소소한 낙이 되자 땅강아지로부터 알게 모르게 힘과 기를 받았다. 그때 세상에는 천기(天氣)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기(地氣)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땅강아지와의 우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주말이면 근교에 나가 땅강아지를 찾았다. 땅강아지의 주 거주지는 땅속이고 핵심 역량은 땅 파는 재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재주도 조금씩 있다. 날기도 하고, 기어오를 줄도 알며, 물통 속에 넣으면 앞발을 움직이며 헤엄치기도 한다.   땅속에서 나와 강아지와 같은 발랄함을 보여주는 땅강아지에게 ‘땅’과 ‘강아지’를 합쳐서 작명한 데서 옛사람들의 재치가 느껴진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는 땅강아지의 생김새는 귀뚜라미를 닮아서 영어로는 ‘모울 크리킷’이라 한다. ‘모울(mole)’은 두더지를, ‘크리킷(cricket)’은 귀뚜라미를 의미해서다. 땅강아지와 모울 크리킷, 어느 쪽이 더 멋진 이름일까.   땅콩 수확을 마친 후 정영록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여주에서 땅강아지 본 이야기를 했다. 여주처럼 모래가 많은 하동이 고향인 그는 땅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반가운 듯이 나오는 땅강아지를 보면 은퇴한 베이비 붐 세대가 생각난다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는 전등 빛에 반갑게 다가오는 땅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베이비 부머’라는 은퇴 세대가 있습니다. 신생아 출산 25만의 인구절벽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은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베이비 부머를 경제활동에 투입해 젊은 세대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노동력 부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게다가 베이비 부머는 경제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요즘 세대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한다면 그들은 ‘살기 위해’ 일했다. 참을성이 많은 그들은 영화 ‘인턴’에서 70세에 입사한 주인공이 경륜과 성실로 자리를 잡아나가듯 소정의 인턴 과정만 마치면 ‘산업역군’으로 거듭날 수 있다.   땅콩밭에서 필자가 마주했던 땅강아지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혹시 저를 부르셨습니까?” 깊어가는 가을, 오늘도 숨어 우는 바람 소리에 베이비 부머의 장탄식이 섞여 있는 듯하다. 곽정식 / 수필가삶의 향기 땅강아지 땅콩밭 농부가 땅강아지 시절 땅강아지 메뚜기 강아지풀

2023-11-26

[삶의 향기] 우주만물은 ‘서로 안에’ 있다

적적한 시골이라 누가 찾아오면 귀인을 만난 양 반갑다. 며칠 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귀농한 젊은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시금치 한 단을 건네준다. 이거 제가 키운 거예유. 붉은 흙이 그대로 붙어 있는 풋풋한 시금치. 감사의 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그 친구는 바쁜 일이 있다며 낡은 트럭을 몰고 씽~ 사라진다. 나는 손을 흔들어 배웅한 후 시금치를 다듬으며 그가 한 말을 곱씹어본다.   이거 제가 키운 거예유! 겨우 귀농 2년차의 서툰 농부인 그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키웠으니 스스로도 얼마나 대견했을까. 하지만 그의 말은 반만 진실이다. 어디 저 혼자 시금치를 키울 수 있단 말인가. 햇볕, 공기, 물, 바람, 그리고 땅속 미생물의 수고는? 나중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나면 고맙다는 말은 하겠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틱낫한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해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구름과 강과 더불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 또한 강으로 들어간다.// 구름과 강과 더불어 해로 들어간다./ 우리가 서로 안에 들어가지 않는/ 그런 순간은 없다.’(‘서로 안에 있음’ 부분)   이 단순 소박한 시는 우주만물이 ‘서로 안에 들어가지 않은/ 그런 순간은 없’다고. 하지만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갇힌 이들은 ‘서로 안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나와 너’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분리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나’라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 이웃, 나와 자연, 나와 하느님 사이에는 분리의 장벽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뿌리. 사실 내 존재가 모든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망상에 다름 아니다. 어떤 수행자가 말한 것처럼 ‘꽃’은 ‘꽃 아닌 것들’ 없이 꽃일 수 없다. 꽃 아닌 것들, 즉 햇빛, 흙, 물, 바람, 공기, 곤충, 새 등이 없으면 꽃은 꽃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 나는 ‘나 아닌 것들’ 때문에 겨우 존재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우주 안의 다른 존재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양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이런 착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결국 지구 공동체마저 파괴하고 말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과 ‘서로 안에 있’다는 자각 속에 살았던 예수. 그는 그러한 자각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며 분리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일깨웠다. 예수가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 남긴 유언과도 같은 기도문에는 그러한 소명이 잘 드러나 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23)   그러니까 예수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 따라서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도 ‘서로 안에 있음’, 즉 합일의 희열을 나누길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신성한 원본(原本)이신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본래 모든 존재가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것.   실낙원 이후 인간을 지배한 것은 합일이 아니라 분리의 관습. 이 오래된 분리의 관습이 깨지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분리의 관습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신의 관습, 즉 합일의식을 일깨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알짬은 결국 ‘서로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   모름지기 나무들 없이는 살 수도 없으니 나와 나무는 ‘서로 안에 있음’이고, 밥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나와 밥은 ‘서로 안에 있음’이며, 지구 온난화로 빙산이 녹아내린다는 저 북극이 미치는 기후변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니 나와 북극은 ‘서로 안에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주만물이 서로 안에 있다는 또렷한 자각으로 우리가 산다면, 지상의 모든 차별, 미움, 증오, 학대, 다툼, 갈등을 줄여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자본주의가 야기한 지독한 이기심에 물들어 ‘서로 안에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이 부박한 시절. 어떤 신학자는 이런 우리의 처지를 “자비를 유배 보냈다”(매튜 폭스)고 일갈했다. 자비를 유배 보낸 뒤 우리 삶의 처지는? 돈, 편리, 속도의 악령이 우리의 혼을 널름 삼켜버렸다. 이제라도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악령의 꾐에 속아 분리의 가위질만 계속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실과 바늘처럼 분리된 것들을 꿰매는 사랑과 합일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진하 / 시인·목사삶의 향기 우주만물 농부가 원천이신 하느님 하느님 사이 아버지 아버지

2023-09-24

[열린광장] 농사는 힘들다

농사는 힘들다. 요즘 같은 폭염에 딸기를 따는 일꾼들을 보면 북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조 농사를 하던 생각이 난다. 황해도에서 수리 관개 시설이 잘 되어있는 신천, 재령, 사리원, 해주 평야를 제외하고 산간 지역에서는 주로 조 농사를 지었다. 일반 주민의 주식은 좁쌀이었다. 남한에서는 서숙이라고 부른다. 영어 이름은 foxtail millet이다.     손길이 많이 가는 곡물이 조다. 다섯 번 김을 매주어야 한다. 손으로 씨를 뿌린 다음, 조가 나오면 잡초를 제거한다. 이것을 애벌이라고 한다. 푸른 싹이 한 자 정도 자라면 두 번째 김을 매준다. 조가 무릎까지 올라오면 세 번째 김을 매주며 호미로 북을 준다. 소가 끄는 가래로 홈을 판 다음 호미로 흙을 올려주는 것을 북을 준다고 한다. 네 번, 그리고 다섯 번째 김을 매줄 때는 조 이삭이 나온 삼복 여름이다. 사람이 보일락 말락 높이 자란 조밭 속에서 김을 매며 호미로 북을 준다. 숨이 막히는 폭염이다. 비지땀이 쏟아진다. 농부들은 물속에서 나온 물개처럼 땀에 젖어있다.     잡초 제거뿐 아니라 흙을 긁어주기 위해 여러 번 김을 매준다. 흙을 긁어주면 비료를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농부들이 힘들고 지칠 때 등장하는 것이 막걸리다. 우물 속에 넣어 두었던 시원한 막걸리 한 잔씩 마시고 취기가 돌면 노랫가락이 나온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힘들게 지은 농사지만 좁쌀밥은 맛이 없다. 목으로 넘어가기 힘들다. 그래서 입쌀과 좁쌀을 섞어서 두 칸 밥을 짓는다. 우리는 열 식구가 사는 종갓집이었다. 큰며느리인 어머니가 밥을 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애들은 입쌀과 좁쌀이 반반, 두 며느리의 밥은 강조밥이었다.     어머니와 삼촌 댁은 항상 강조밥에 물을 부어 먹었다. 조는 메조와 차조로 나눈다. 차조 맛은 훨씬 낫다. 메조 밥은 입으로 불면 모래처럼 날아가지만 차조는 끈기가 있다. 갈치와 열무김치와 차조밥에 집 나갔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농사일은 힘들다. 불가에서 발우공양 전 식사 작법 즉 오관게 (五觀偈)를 게송 한다. 이 게송 가운데 이런 문구가 있다. ‘계공다소 양피내처 計(功多少量被來處), 정사양약 위료형고 (正思良藥爲療形枯)’. ‘이 식사가 있기까지 얼마나 공이 든 것인가를 생각하자, 밥 먹는 것을 약으로 여겨 몸의 연약함을 치료하자’는 의미다.     우리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밥 먹기 전에 이 식사가 내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공이 든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내려주셔 곡식, 채소, 그리고 과실이 자랐다. 농부가 땀을 흘리며 이것들을 수확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어머니 또는 아내가 음식을 만들어서 테이블에 올렸다. 감사의 식사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농사 식사 작법 식사 기도 농부가 땀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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