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팔십이란 언덕에 서서
온 사방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수고했다, 신통하다, 스스로 칭찬해 주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희미하고 까마득한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입니다. 하얀 안개 속에 지나간 나의 삶이 손짓하면서 나를 부릅니다. 와락 그리워집니다. ‘다시는 내려갈 수 없는 저 험한 길을 잊어라!’ 멀리서 들려옵니다. 누가 나를 부를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저 뒤에 내가 이제부터 가야 할 똑바르고 평평한 하얀 길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길 끝은 어디쯤이나 될까? 감이 없었습니다. 겁이 덜컥 나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쪽은 동쪽입니다. 저 수평선에서 늘 고맙고 웅장한 붉은 해님이 나를 부릅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손을 모아 잠깐 고마움에 기도를 올렸습니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저 하얀 구름 사이로 늘 대화를 나누고 싶은 쟁반같이 둥근 달님이 또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잠시 어디엔가 주저앉아 다시 사방을 둘러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아, 여기가 어디던가? 처음 와보는 신기한 자리! 내 자리가 아닌 듯 낯설었습니다. 지나간 날들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곳! 잠시 뒤를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달라졌던가? 물어봅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이곳이 바로 순리를 따라 왔던 종착역이었던가? 묻고 또 묻습니다. 다시 뒤를 돌아봅니다. 저 하얗고 깨끗하게 보이는 저 길은 이제부터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듯 쓸모 있게 보였습니다. 저 길을 그저 생각 없이 무의미하게 걷기보다는 보다 예쁘게 단장한 보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고 싶구나 혼자서 중얼거려 보았습니다. 이렇게 칠십과 팔십이 다르다고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몸이 말해 줍니다. 마음도 머리도 하루가 다르게 신호를 보냅니다. 단어와 이름들이 희미해집니다. 멍청이가 되라 하는 것 같습니다. 걱정도 집어치워 버리라고 합니다. 걱정해서 되는 것이 없다나요? 그럼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 또한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네요? 세끼 밥에 청소에 빨래 이러다 보면 하루가 갑니다. 그런대요! 내 속 심사가 ‘너 그렇게 살지 마라’ 점잖게 훈계 한마디를 던지고 지나갔습니다. 팔십이 되기까지 과연 너는 열심히 살았던가? 다시 나에게 물었습니다. 후회와 잘못과 어리석었던 등등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남겼던가? 얼마나 많은 말실수를 했던가? 이렇게 끄집어 내어보니 머리가 어지러워집니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길만이 나를 다스립니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자. 죄 사함은 오직 높으신 님께 드리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80 언덕에 한참을 앉아 많은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부터는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라! 너 자신이 누구인가를… 더도 덜도 아닌 너를 사랑하는 것이 너의 책임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공부하라! 노래도 하고, 글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네 주위에서 가능한 일을 찾아라! 건강을 지켜라. 이런 명령들을 나 스스로 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의 한 가지 재주 아니면 나의 취미, 나의 자신감을 존중하며 꽃꽂이 강습을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노인 학생들이 좋아하며 즐기는지요! 이것이 바로 나의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다. 늘 하고 싶었던 내가 사랑하는 꽃들과의 대화가 나의 건강과 생을 지켜주리라 다시 다짐했습니다. 남순자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팔십이란 언덕 팔십이란 언덕 꽃꽂이 강습 노인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