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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개고생 동지들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새 문화원 개관식에서 한때 나와 같은 처지의 화가 부인을 만났다.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우리 내일 우보경 개인전에 가서 응원하자.”     오랜 인연을 이어오는 화가 부인들의 남편들은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온 선후배 관계다. 아트 졸업장으로는 직장 잡기 힘들다. 마약을 끊지 못하듯 작업하기를 고집하는 화가 남편을 둔 와이프들은 집안 경제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보경 작가를 그녀의 남편 대학원 졸업 전시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싱그럽고 수줍은 싱글들이었다. “목소리 한번 들어봅시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는 말이 없었다. 내가 말이 없었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 나는 정말 그랬다. 화가와 결혼하면 고생길이 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뭐에 씌었는지, 철없는 우리는 겁도 없이 연애 시절부터 남편 될 남자들을 서포트했다.     우 동지(무슨 독립군 비밀 요원 호칭 같은)는 유학 생활 중, 어디서 그렇게 커다란 노란 양은 냄비를 구했는지 냄비 가득 푹 익은 무를 넣은 오뎅과 음식을 만들어 와서 연인(훗날 남편인 화가 최성호) 오프닝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가난한 유학 시절 그 오뎅이 어찌나 맛있던지! 우 동지도 프랫 대학 학부와 대학원 졸업은 했지만, 결혼하자마자 생계를 위해 붓을 놓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모두 다 접고 작업에 몰두하며 뉴저지 포트리, ‘패리스 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다.     온 심혈을 기울인 작품에서 영혼이 깨어나 지난 힘든 날을 속삭이듯 커피 필터(커피 내리고 난) 바탕 위에서 살아난다. 능숙하면서도 절제된 작가의 손놀림은 장단에 맞춰 춤추듯 강하면서도 은은한 색과 선이 감각적으로 피어난다. 기막힌 묘사력은 빛바랜 민화를 싱싱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부활시킨다. 작품이 팔렸다는 붉은 신호가 곳곳에 반짝였다. 도대체 얼마 만인가? 브루클린 창고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올해로 정확히 40년 만이다.     “오셨어요. 코트 벗으세요. 걸어드릴게요.”   전시회에 맞춰 평상복 검은 치마 위에 초록색 한복 윗저고리를 입은 갤러리 운영자인 고수정 씨가 나를 반긴다.   “개고생 동지 개인전에 오지 않을 수 없지요.”   “저도 개고생해요.”   “자기 남편은 화가도 아니잖아요.”   “화가 친구를 뒀기에. 하하하.”   그녀 말에 백배 공감한다. 화가 남편을 둔 부인도, 화가 부인을 둔 남편도, 화가 주위의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가 개고생이다. 이수임 화가·맨해튼글마당 개고생 동지 개고생 동지들 화가 남편 남편 대학원

2024-03-22

[글마당] 개고생

서울에서 온 화가 전시회였다. 화가 부인을 소개받았다. 훤칠한 미모의 지적이며 단아하고 선한 인상이다. 그녀는 사려 깊은 모습으로 조용히 사람들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요 방정맞은  입에서 “저도 화가 와이프이지만 화가 부인하느라 개고생 많이 하셨지요?”   눈물이 핑 돌아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녀가 말했다.   “개고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 편히 터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장 다니며 남편 서포트한 그녀의 사연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이지 화가 와이프 하기 쉽지 않다. 화가라는 직업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일단 없다. 꼴에 풀타임으로 작업하고 싶어 한다. 큰 작업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재료비는 말하면 잔소리다. 차라리 컴퓨터 하나만 들고 작은 공간에서 글 쓰는 소설가 부인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커다란 작업 공간에서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없애고를 반복해서 겨우 만들어 낸 괜찮다는 작품도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전시를 위해 사진 찍어야 하고 팸플릿 만들기 위해서는 글을 받아야 하고 운반해야 하고 오프닝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엄청나게 깨진다. 뭐 유명해지면 갤러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그전까지 뒤에서 물심양면 지원하는 부인들이야말로 개고생이다. 유명해지는 것은 로또 맞을 확률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이 중간에 떨어져 나가고, 또, 또 떨어져 나간다. 골인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부부가 합심해서 달려도 골인 언저리에 도달하기가 무척 힘들다.     요행히 화가로 이름이 조금  날리면 혼자 노력해서 달려간 양 거들던 부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일쑤다. 그나마 조금 성공한 화가의 말이 생각난다.   “마누라 얼굴만 봐도 개고생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싫어.”   싫은 마누라 피해 밖으로 나돌다가 젊은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이어진다. 결국엔 조강지처는 버림을 받는다. 다행히 옆에서 후원한 와이프를 불쌍히 고맙게 여기는 화가도 있지만, 많은 남자가 그렇듯 성공하면 주위에 젊은 여자들이 달라붙는다. 젊은 여자가 좋지, 늙은 마누라가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조강지처 버리고 잘된 화가를 못 본 것 같다. 게다가 화가는 자기는 재능을 선택받아 남과 다른 일을 하는 양 잘났다고 타협하지 않는다. 예민한 성질 또한 부인이 개고생하는 데 한몫 거든다. 글쎄 다른 화가들은 모르겠지만, 내 남편의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보겠다. 모처럼 식당에 갔다. 밑반찬이 주르르 나왔다.     “이 반찬들 들락날락했던 것 아니야?”   “맛있어 보이는데 왜 또~ 밑반찬이 무슨 잘못이라고.”   조용히 깍두기만 우적우적 씹는 찌그러진 얼굴색이 좋지 않다.     “항상 당신이 가자는 식당에 가다가 처음 내가 오자고 한 식당이잖아. 밑반찬 많이 나오는 식당이 싫다고 성질 내는 인간도 있을까? 먹지 마. 내가 다 먹을게.” 나는 반찬 접시마다 다 가져다 싹싹 먹어 치웠다. 남편이 가고 싶어 하는 김치 한 가지 나오는 설렁탕집으로 가지 않았다고 트집 잡기 시작하더니 짜증 내며 하루를 망친다.     ’아이고 내 팔자야. 차라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내 신세보다는 낫겠다. 내 나이도 절에서 받아줄까? 금전 두둑이 가져가면 받아줄까?‘     항상 어딘가 튈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푼수처럼 ’개고생‘이라는 헛소리나 하고. 헛소리하며 스트레스 풀지 않으면 화가 부인으로 살아남기 정말 힘들어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개고생 화가 부인 소설가 부인 작업 공간

20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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