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사막에서 만난 순백(純白)
대륙을 섭렵하는 묘미의 으뜸은 대자연의 진수와 만나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맛보는 것이다. 드넓은 평야와 우람한 협곡, 그 안에서 나름의 형태로 존재하는 온갖 사물들의 의미를 음미하고 일체감을 얻을 때의 깨달음과 기쁨은 가히 희열에 가깝다. 감정은 맑고 순수하며, 성찰의 계제에 세상의 어지러움과 사악함이 파고들 틈새는 없지 싶다. 1980년대 미국에 온 이후 태평양 연안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101번 고속도로를 기회 있을 때마다 수없이 애용했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근래에는 5번 고속도로를 더 선호한다. 몇 시간씩 달려도 동쪽으로는 끝없는 광야가 펼쳐져 있고, 서쪽에는 희끄무레한 화강암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줄곧 따라온다. 뜨거운 햇볕에 메말라 죽은 풀들, 생물들이 살 것 같지 않은 박토, 구불구불 이어지는 구릉, 용암이 융기한 날카로운 바위산과 계곡은 원시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차를 세우고 들여다보면 뜨거운 돌과 건초 사이로 이름 모를 벌레들이 스멀거리고, 선인장이 앙증스러운 꽃잎으로 반기며, 스프링클러로 연명하는 과수원에는 다람쥐가 쭈뼛거린다. 광대한 황야와 태산을 바라보고 있거나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력을 만날 때면 그 장엄함과 신비함에 매료돼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새삼 반추해 보게 된다. 매료되는 순간에는 마음이 백지처럼 깨끗하다. 세상살이의 난삽함은 모두 지워지고, 앞에 펼쳐진 자연의 현실과 진실만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존 스타인벡의 명작 ‘분노의 포도’의 마지막 무대인 베이커스필드 갈림길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자동차 연료를 채우고 나서 요기를 하러 바로 옆의 ‘인 앤 아웃(IN-N-OUT)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다. 점심때라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기다렸다. 언뜻 한 백인 부부가 음식을 들고 줄 너머 반대편으로 건너가려고 틈을 찾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좁은 공간임에도 얼른 뒷걸음질 쳐 간신히 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친절하시군요.” “천만에요. 당연하지요.” 정중한 감사 표시에 맞게 미소를 띠며 깍듯이 답례했다. 그들의 평소 삶의 자세가 매우 바르고 성실하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흔한 인사지만 양측의 표정과 음성에도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차례가 되어 음식을 받아 아내가 잡아 놓고 있는 자리에 앉는데 아까 그 백인 부부의 옆자리였다. 그들이 파안대소하며 먼저 반겼다. 우리는 자연히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서로 여행에 관해 물었고, 여러 이야기 중에 자신들이 UC머세드 교수라는 소개가 나왔다. 낮 가리지 않고 소박한 열린 자세의 향기가 맑디맑고 향긋하게 전해졌다. 아마도 캠퍼스와 자연에서 형성된 청아한 성정이리라. 우리는 미소가 가득한 환담을 하고 교차 포옹으로 작별했다. 떠나는 그 부부의 뒷모습이 긴 여운을 남겼다. 눈빛이 형형한 두 사람의 자태가 자연의 진수가 조각한 형상이라고 여겨졌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막과 산맥을 배경으로 그 형상을 그린다면 어떤 명화가 나올까?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이 아침에 순백 사막 백인 부부 존재 의미 베이커스필드 갈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