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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20세기 초 미국은 수많은 과학 기술과 새로운 제도가 생겨나 풍요를 누리면서 모든 주식은 끝없이 상승하였다.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한 사람이 느닷없이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하자 수 많은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매도는 도미노처럼 일어났다. 수습이 불가능한 사태로 치달았다.     주식 시장의 붕괴는 경제 발전의 적신호다. 800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900만개의 예금 통장이 사라졌다.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미국의 경제는 14만개 기업의 부도를 처리했고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미국서 시작된 이 위기는 영국 독일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을 강타했고 세계는 경제 공황에 빠졌다.   이 때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이를 극복하리라 생각했지만 대공황은 계속됐고 국가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1700만명이 직업을 잃었고 200만명이 길거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2년 민주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희망”이라는 경선 구호로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민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어 줄 것을 호소했다.     서방 국가들이 경제위기를 맞고 있을 때 새로 탄생한 소련의 국가 풍경은 황홀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사회의 관리 방식을 창조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계획경제라고 불렀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서방의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는 몇년동안, 소련은 첫번째 5개년 건설계획을 실시한다.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전했고 사회 전반에도 발전이 이루어졌다. 서방의 정치가들은 소련의 성공에 주목했다. 정부의 간섭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미국은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기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유주의 경제에 나타난 시장의 문제점을 발견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정부는 보이는 손이 되어 경제에 관여하고 국가의 힘을 경제 정책에 이용해야 한다”며 프랭클린에게 편지를 써서 정부 지출을 증가시킬 것을 권했다. 그는 취임 즉시 경제에 대한 정부의 대규모 관여를 시작하였다. 긴급 은행법을 통해서 은행 질서를 정돈했고 긴급 구제법을 통해서 구조기관을 설립해 빈곤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돌보게 했다.   농업 조정법을 통해서 농산품 가격 회복을 도왔고 정부 산업 부흥법을 통해서 경제 복구에 자금을 투자했다. 1933년 테네시강 관리국이 설립됐다. 국가의 지도와 정부의 투자로 이 유역에 20개의 새로운 댐을 건설했고. 대량의 공공 건설 작업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경제위기가 가져다준 사회 불안을 노동을 통해서 해소한 것이다.     미국은 새로운 정치 기간에 노후 대비와 실업 분야 같은 사회보장 체계를 구축했다. 대통령이 추징한 사회 혁명과도 같았다. 프랭클린은 국민들에게 가난을 피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빈곤에서 벗어 나는 일이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빈곤을 막아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유명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론“이다.   1936년 미국의 경제는 회복하고 있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새로운 정치는 시장 경제의 새로운 발전 방식을 창조했다.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과 정부의 보이는 손이 힘을 합쳐 경제를 자극했으며 시장 역할과 정부 역할을 동시에 발전시켰다. 그는 대통령 4선을 지낸 후 세상을 떠났다. 전쟁 직후 미국의 산업 생산량은 전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고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 금융체제를 구축했다. 20세기 후반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국이 등장한 것이다. (hanhongki45@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roosevelt 프랭클린 민주당 프랭클린 경제학자 케인스 경제 발전

2022-04-21

[한홍기의 시카고 이야기]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미국의 제26대(1901~1909) 대통령이다. 당시 초고속으로 성장한 19세기 말 미국 경제는 정부의 관리 감독이 비교적 약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무질서한 경쟁, 독점 그리고 사기, 부패 등이었다. 이 현상이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취임 후 직면한 위기였다. 대기업은 대량의 경제 자원을 집결시켰고 심각한 사회 문제를 초래했다. 노동자들의 이익과 사회 평등을 파괴했고 중소기업의 성장을 방해했다. 수 많은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그늘 속에 파산했다.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록펠러는 미국의 100여개 기업을 삼켜 버렸다. 이때까지 정부는 대기업에 대해 눈을 감아 주었다. 기업이 커져가는 것이 국가에도 유리하고 기업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건국 후 100여년 간 영국으로 이어 받은 자유 경쟁 체제를 하여 왔다. 강한 자가 살아 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원리에 입각해 정부는 시장 경제를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에서 많은 국민들이 어떻게 이익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 일부 중산층을 중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독점, 부패, 위조 등의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는 글들이 언론을 통해 흘러 나왔다. 20세기 초, 뜨거운 사회 운동의 열기가 일어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1920년 때까지 계속 지속되어온 이 운동을 진보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어려서부터 펜실베니아 석유 생산 지역에서 자란 유명한 여기자 ‘아이다 타벨’이 록펠러가 경쟁사인 그의 아버지와 다른 석유 생산 업자들을 공격할 때 어떻게 비참하게 몰락시켰는지 목격하고 대기업 뒤에 숨겨진 비리를 철저히 조사하여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2년 동안 장편 시리즈로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잔인한 방법을 동원한 부의 축척과 독립제국을 어떻게 세웠는지에 대해 책을 썼는데 바로 베스트 셀러가 되어 버렸다     타벨은 막강한 석유제국에 도전장을 냈고 사회적인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수 많은 진보 인사들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정부 사회에 의문을 제기했다. 시어도어는 경제 분야로 시작된 첨예한 갈등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질문에 깊은 고뇌에 빠졌으며, 그는 사회의 강력한 압력 속에 어쩔 수 없이 진보 운동 쪽에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 정리에 들어 갔으며 이를 위해 다른 대기업의 본보기로 스탠다드 석유회사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1911년 미국 최고 법원은 이 회사가 셔먼의 반 트러스트 법을 위반했고 자유 경쟁을 방해 했다고 판결했다. 스탠다드는 여러 개의 작은 회사로 강제 해체되었고 요즘의 겨우 남은 ‘모빌’사가 그 중의 하나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당초 이 현상에 의아해 하였으며 록펠러 자신도 더욱 왜 이런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도움 없이 자수 성가해 어렵게 키워낸 자신의 제국이 미국 사회에 가져다 준 상처를 그는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기회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효율을 희생 시키더라도 평등을 중요시 하였기 때문이다. 시어도어는 재임기간 동안 40여개의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쇠고기, 석유, 담배 회사가 사법부의 결정 아래 강제 해체 되었고 헌법을 통해 정부의 안이 수립 되었다. 그 후 시어도어는 노사갈등 문제의 해결에도 착수하였다.   그는 노사 대표들을 직접 백악관에 초청하기도 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지론은 자본주의가 도를 넘어 거대 기업의 횡포조차 감시, 관리하지 못하면 미국에도 사회주위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러일 전쟁을 종식 시킨 공로로 미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hanhongki45@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이야기 roosevelt 시어도어 시어도어 루즈벨트 스탠다드 석유회사 정부 사회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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