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정진철 형을 떠나보내며
정진철 형,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형의 성품을 알고는 있었지만 무엇이 그리도 급해 이 겨울에 서둘러 가셨습니까? 청바지 차림의 만년청년으로 평생을 누구보다 활기차게 사셨고, 이민사회 동포들을 누구보다 열심히 사랑하셨던 정진철 형, 당신은 남가주 한인사회를 지켜준 큰 나무였습니다.60년도 더 된 세월 한국에서 상업방송이 고고의 소리를 올린 서울 인사동 동일가구 3층에 있던 문화방송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형은 저보다 한해 먼저인 1964년 보도국 기자로, 그리고 저는 그 이듬해 아나운서로 입사해 뉴스 부스와 스튜디오에서 자주 만나며 늘 호탕한 형과 선후배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방송국 개국 초라 월급날짜도 안 지켜져 취재 나갔다 돌아올 때 근처의 중국집 직원과 다방 여주인들이 현관에 앉아 있으면 그날 봉급이 나오는 날로 짐작했고, 어떤 달은 수금이 안 됐다며 영업 사원이 들고 온 ‘동산 유지 비누와 치약’ 으로 월급을 보충받던 그런 시절을 우리는 웃으며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상업방송이 궤도에 오르고 직원들 후생도 안정기에 들어선 1970년 어느 날 형은 홀연히 방송국을 떠났다는 소식이 돌았습니다. 규율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형의 성품을 아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를 했습니다. 형은 괌으로 떠났다가 1975년에는 하와이로, 최근에는 몽골까지 섭렵했습니다.1977년 LA로 건너와 미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라디오 서울에서 중책을 거친 다음 손수 인터넷 방송을 개국하기도 했습니다. 저와는 1992년 라디오 서울의 전신인 미주한인방송에서 같이 일을 했었고 그 뒤로는 라디오 코리아 시사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자주 만나 형은 보수로, 나는 진보 논객으로 치열하게 다퉜지만 방송국만 나서면 웃으며 헤어지던 우리는 영원한 절친이었습니다.
뉴저지로 가겠다고 했을 때 MBC 사우회원들과 따뜻한 송별모임을 해주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멀리 떠나와 형의 부음을 듣다니…. 때로는 바른 목소리로 때로는 시원한 그늘로 이민사회를 지켜주셨던 정진철 형, 당신은 큰 나무였습니다. 형과 함께했던 날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편히 쉬십시오.
김용현 / 언론인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