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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장막을 걷어라, 행복의 나라로

곱슬머리 간호사가 생년월일을 묻는다. 어느 쪽 눈인지 물으면서 왼쪽 눈 위에 테이프를 붙인다. 눈을 헷갈릴 염려는 없다. 의사의 실수로 환자의 성한 쪽 신장을 떼어냈다는 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혈압을 재니 평소보다 많이 올라가 있다.
 
“이 수술을 왜 하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나는 전에 한 백내장 수술이 잘못되었고, 그로 인해 망막에 이상이 왔다고 답했다.  
 
“처음 수술을 누가 했어요? 닥터 A가요?” “아뇨, 다른 닥터였어요.” “닥터 A는 수술 잘해요. 의사 집안이에요. 아버지도 여동생도 안과 의사예요.”  
 
수술 5분 전,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간호사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따뜻하게 데워진 담요를 어깨에 감싼 채 수술실로 들어갔다. 키가 훤칠한 닥터 A가 다가왔다. 빨리 수술을 받게 돼서 운이 좋다고 말한다. 얼굴에 커버가 쓰이고 눈 하나만 노출된 듯했다. 드디어 정신이 몽롱해 온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용어를 해독하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P5, HPT 24 and 25 등등.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자는 것도 아니고 안 자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흠’하는 닥터의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지? 뭐가 어려움에 부닥쳤나? 다시 의사의 톤이 빨라졌다. 어쩌고저쩌고… 나는 다시 의식 밑으로 떨어졌다.  
 
“OK. It‘s all done!” 닥터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다. 한 20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수술이 꼬박 한 시간 걸렸다고 말해준다.  
 
발단은 몇 년 전 백내장 수술로 거슬러 간다. 수술하던 중에 갈아 끼운 렌즈 뒤 표면에 점액질이 달라붙었다. 거기다가 렌즈가 눈동자 살짝 옆으로 비켜서 박혔다. 시간이 지나자 말라붙은 점액질이 눈에 장막을 드리웠다. 빗나가서 박힌 렌즈는 세상을 이중으로 보이게 했다. 마치 물속에서 사물을 보는 듯이 눈이 어른거렸다. 나는 내 눈이 답답함을 감지 못하도록 더 어둡게 만들었다. 항상 선글라스를 꼈다. 어둠에 익숙한 두더지 같은 눈을 가지고 다른 쪽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무엇을 응시하는 것이 피곤했다. 흐린 시야에 갇힌 나는 기분이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외롭고 믿지 못할 세상이었다. 닥터 A는 이런 눈으로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날 체크 업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말했다. 눈이 환해지니 마음도 환해졌다. 곱슬머리 간호사의 친절한 말 한마디는 수술받는 동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실력 있는’ 닥터라는 말에 혈압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 세상은 분명 엉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책임감을 가지고 소신껏 일하는 닥터 A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돌아간다고 믿고 싶다. 그들의 진실하고 선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온다. 나도 따라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길쭉한 버터 넛 스쿼시를 수술 전에 사 두었다. 노란 주홍빛이 감도는 호박 수프가 눈에 좋을 것 같아서다. 당근, 셀러리 등 채소를 듬뿍 넣고 넉넉하게 끓였다.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냄비 가득 찬 수프를 보고 있자니, 앞집 젊은 엄마가 생각났다. 최근에 아이가 아파서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 집 문 앞에 놓고 나오는데, 소파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강아지가 신나게 꼬리를 흔든다.  
 
나의 흐릿했던 세상에 장막이 걷혔다. 이중으로 보이던 나무도 소파도 깨끗한 단선이 되었다. 나는 소경이 눈을 뜬 듯 행복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12월의 끝자락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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