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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마중물

얼마 전에 한 지인과 대화 중에 ‘마중물’이란 단어를 배웠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눈이 번쩍 떠졌다. 아주 어렸을 적 우리 집 뜰에 펌프가 있었다. 물이 필요할 때 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를 시작하면 물은 한없이 올라왔다. 그 한 바가지 물이 물을 마중 나간다는 뜻에서 마중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물은 지하수여서 엄청 시원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큰 함지박에 수박과 참외를 둥둥 띄워 먹으며 더운 여름을 나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소원했던 시 쓰기에 맥이 끊겨 그 맥을 찾고 끌어올리는 데 힘이 들었다. 나에게 마중물이란 시심을 일으키기 위해 시집을 읽는 일이다. 몇 번이고 같은 시를 읽고 또 읽다 보면 나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어떤 단어가 낚싯바늘에 걸린 듯 올라온다. 나의 그다음 작업은 그 단어와 관련된 의미를 유추하고 연구하며 키워나가는 일이다. 한 예로 ‘절실하게 되면 날개가 돋는다’라는 표현에 나는 완전 감동이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하는 순간 바로 그 절박함과 간절함은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희망을 보여준다.  
 
언젠가 박완서 평전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가 글을 쓸 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그물을 던져 필요한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라고 쓰셨다. 그처럼 우리는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얻은 경험을 우리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두게 된다. 이 모든 경험 중 하나둘씩 필요할 때마다 건져 올려 삶을 재창조할 수 있지만 찾지 않으면 영원히 사장될 수도 있다.  
 
옛 어른들은 화로에 불씨가 꺼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불씨가 남아 있어야만 쉽게 불을 지필 수가 있고 사람 사이의 인정이 훈훈하게 피어오른다고 하셨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환자실에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이 환자들은 모두 무슨 연유에서든지 자가호흡이 불가능한 경우이다. 이 인공호흡기는 폐의 기본 세포인 허파꽈리에 공기를 약 25% 정도 항상 채워 놓는다. 그래야만 호흡이 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완전히 빠진 고무풍선보다 공기가 조금 남아 있는 풍선이 불기가 훨씬 쉬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게 마련//…’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의 ‘제목이 없을 수도’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비록 일시적인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이 있기까지 누구에게나 무수한 과거가 있고 토요일 전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금요일이 있고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다는 인간 고유의 경험을 강조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시다. 199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녀는 시단의 모차르트로 불린다. 그녀는 세상과 삶에 대해 경이로운 눈빛과 호기심, 슬픔을 갖고 ‘영원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재능을 가진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끝과 시작’이란 시집 제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시작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끝에서 시작한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보고 받아들이지만, 그녀는 그 현상이 있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까지 살펴보는 예리한 통찰이 있다.  
 
세상은 곳곳에서 또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당신의 마중물을 기다리고 있다. 물의 씨, 불의 씨, 또 호흡의 씨가 발아되지 않은 채 그대로 소실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모든 것의 끝은 새로운 것의 시작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설과 통한다. 주어진 운명을 탓하지 않고 힘에의 의지를 믿고 모든 순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사는 부단한 노력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용기와 결단으로 부정적인 삶도 받아들이고 그 순간의 영원회귀를 바랄 만큼 삶을 사랑하라는 자세가 아닐까.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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