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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탈북…넘지못한 편견의 벽

12일 한인타운서 탈북민대회
미국 거주 탈북민 50명 참석
아픔 나누고 차별 편견 알려

중국에선 탈북여성 인신매매
한국은 임금차별·불체자 취급
일부 한인들 우릴 돈벌이 삼아

14일 대한 장의사 야외 납골당을 찾은 탈북민들이 지난 2020년 숨진 주옥순 씨의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김상진 기자

14일 대한 장의사 야외 납골당을 찾은 탈북민들이 지난 2020년 숨진 주옥순 씨의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김상진 기자

누리지 못했던 자유 하나만 바라보고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다. 제 3국을 거쳐 어렵게 미국까지 온 그들이  먼저 마주한 것은 자유와 희망, 행복 대신 차별과 편견이었다.
 
지난 12일 LA한인타운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 제1회 미주 탈북민대회에서는 미국에 사는 탈북민 50여명이 자리해 그들만의 아픔을 나누고 알렸다. 이날 탈북민 권정순, 고명옥씨에게서 생사를 오간 탈북 이후 그들이 마주한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직접 들었다.
 
3차례 강제 북송 … 미국 정착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권정순씨는 강제 북송만 세 번 당했다. 어떻게 탈북을 네 번이나 할 수 있었는지 묻자 그는 “보위부에서 근무하신 부모님 인맥의 도움도 있고, 집안 친척 중 고위 인사가 여럿 있었다”고 간략하게만 말했다.  
 
지난 1997년 7월 중국으로 첫 탈북을 감행했다. 가난 때문이었다. 무작정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부모님 모두 보위부에서 근무해 어려서는 가난이라는 걸 몰랐다”며 “그런데 부모님들이 고난의 행군 때 돌아가셔서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권씨가 향한 곳은 중국 연길이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인신매매였다”며 “모르는 중국 남자한테 돈 받고 팔려가 3년간 같이 살았고 딸도 하나 있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당시 권씨의 나이는 26세였다.
 
2003년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그녀는 지난 2009년 2월 다시 탈북했다. 중국 쿤밍, 태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마주한 한국은 차별과 편견의 사회였다. 그는 “식당에 취직해 첫 월급 130만 원을 받았다”며 “나중에 알고보니 다른 직원들의 첫 월급은 180만원이었다”며 차별을 설명했다.  
 
한국 경찰의 편견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합석한 남성이 친구 몸을 더듬고 뺨을 때려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관들은 오히려 권씨 일행을 불법체류자로 의심했다고 한다.
 
권씨는 지난 2017년 미국에 왔다. 중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중국인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지금의 한인 남편을 만났다. 미국에서조차 편견을 마주한 그녀는 탈북민 단체를 운영하게 됐다. 미주북한인권통일연대 회장직을 맡아 탈북민 인권 제고에 앞장서고 있다. 권씨는 “한국 정치권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진심으로 탈북민의 인권을 외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며 “일부 한인 단체들은 탈북민이라는 주제를 들먹이며 소위 돈벌이를 하려고 한다. 진심으로 탈북민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에 있는 그리운 딸
 
함경북도 출신의 고명옥씨는 권씨와 달리 한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국에 왔다. 2008년 고씨는 아들을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탈북했다. 산후조리도 못 한 몸을 이끌고 갓 태어난 아들까지 업어가며 추운 강을 건넜다. 그 후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을 거쳐 7년만인 2015년 미국에 도착했다. 지금은 유타에 살고 있다. 미국을 선택한 계기를 묻자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한국을 가려고 했는데 아들이 영어권 나라로 가고 싶다고 했다”고 답했다.
 
탈북민이라는 사실로 고씨는 온갖 고초를 겪었다. 탈북 이후 겪었던 어려움에 관해 묻자 고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때 생각만 하면 말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며 “북한 사람인 걸 알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탈북민 여성들이 인신매매로 물건처럼 팔려가는 경우가 많다”며 “연령별로 1000위안(약 138달러), 5000위안(약 687달러) 등에 팔려간다”고 설명했다.  
 
고씨가 탈북한 지 3년 후 고씨의 딸도 뒤따라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는 “딸이 중국 애들과 어울렸는데 중국인 부모들이 딸이 북한인이라는 이유로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면서 “딸이 커서는 중국인들에게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맞기도했다”고 전했다.
 
고씨의 희망은 인간다운 삶이다. 그는 “중국에서는 신분 문제 때문에 아들이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며 “미국에서는 착실히 공부해 사회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탈북민을 향한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는 “딱한 북한 동포들을 품어주길 바란다”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도와달라”고 말했다.

김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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