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도덕 경계 지우고 서부의 생얼을 들추다
[탄생 60주년 ‘마카로니 웨스턴’]
60년대 이탈리아 감독들
서부영화의 신화 자리에
잔혹한 현실적 세계 그려
복잡하고 다면적인 악당
롱테이크·느린 전개 연출
거친 서부 그대로 담아
예전에는 단순하고 악랄한 존재로만 그려졌던 악당들이 이제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며 관객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기원을 찾아 19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석양이 지는 하늘. 굴러다니는 회전초. 모래바람이 스치는 황량한 사막. 반짝이는 보안관 배지. 정의로운 보안관. 웨스턴 영화에 흔히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다. 웨스턴 영화는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르로 ‘개척정신과 이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개척의 종말을 담고 있는 미국의 서부를 무대로 한 장르’라고 표현된다. 1903년 에디슨 스튜디오가 만든 세계 최초 극영화 ‘대열차강도’로 서부극(웨스턴) 장르의 시초를 알렸으며 이후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서부 영화는 미국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대개 웨스턴 영화는 보안관이나 판사처럼 법의 수호자들인 정의로운 영웅과 무장한 원주민, 강도 등 악한 무법자의 대립을 주된 테마로 진행된다.
하지만, 서부개척 시대는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는 피로 물든 약탈의 시기였다. 원주민 문화가 존재하던 서부 황무지로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고 금광 개발을 위해 대량의 사람들이 이주하던 시대이며, 개척자들의 탐욕에 의해 수많은 사람을 향한 인권 유린 및 학살 등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힘이 센 사람이 이기는 약육강식의 무법지대가 펼쳐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는 서부개척 시대가 ‘개척신화’였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학살과 강제이주로 드리워진 암흑기였다.
웨스턴 영화가 흥행하던 시기에 미국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 감독들은 할리우드 서부 영화의 클리셰를 탈피해 더 현실적이고 잔혹한 세계를 묘사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마카로니 웨스턴’이다. 최초의 마카로니 웨스턴은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1964년작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로 알려져 있으며 올해로 60년을 맞이했다. 이 외에도 ‘석양의 건맨(For a Few Dollars More·1965)’,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1966)’, ‘위대한 침묵(The Great Silence·1968)’,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 ‘내 이름은 튜니티(They Call Me Trinity·1970)’, ‘석양의 갱들(Duck, You Sucker! aka. A Fistful of Dynamite·1971)’, ‘무숙자(My Name Is Nobody·1973)’ 등이 있다.
기존 웨스턴 영화와 가장 큰 차이점은 명확한 선악 구분과 영웅적인 주인공과는 대비되는 어둡고 잔혹한 분위기 속에서 모호한 윤리와 반영웅적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주인공도 결함이 있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석양의 무법자’에서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20만 달러에 달하는 금화를 차지하기 위해 3명의 총잡이가 치열하게 싸우는 스토리다. 착하고 도덕적이기만 한 평면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악당인지 주인공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다중적인 인물로 캐릭터 각자가 나름의 윤리적 코드를 갖고 있다.
할리우드 서부 영화는 흔히 백인 개척자들의 용맹과 정의로운 승리를 강조한다. 명확한 선악 대립 속에서 주인공은 악당을 물리치고 약자를 구하며, 서부의 평화를 지키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또한, 주로 이상화된 영웅주의와 낭만적 서사를 통해 관객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반면, 마카로니 웨스턴은 더 현실적이고 복잡한 인간 군상을 통해 서부의 가혹한 현실과 생존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사막의 황량함과 인간의 이기심, 폭력에 물든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때문인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 세력들은 이 장르를 기피했다. 왜냐하면, 기득권층과 보안관들의 부패와 착취를 비판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에는 오히려 마카로니 웨스턴이 본토 웨스턴 영화보다 서부개척시대를 더욱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이 많다.
또한, 리얼리즘을 극대화했다.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은 기존 서부극보다 더욱 잔인하고 현실적인 폭력의 잔상을 그대로 담아냈다. 당시 관객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거장인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연출방식은 롱테이크, 익스트림 클로즈업, 느린 전개 등이 특징이었다. 다시 말해, 영화의 현실감을 살리고 더 거칠고 현실적인 당시의 그대로를 프레임에 담아낸 것이다.
이처럼 마카로니 웨스턴은 서부 영화 장르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독창적인 서사, 거친 리얼리즘, 어두운 분위기, 복잡한 캐릭터 묘사 덕분에 마카로니 웨스턴이 유행하던 시대에서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일부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만주 웨스턴’ 일본 ‘라멘 웨스턴’…끝없는 변주
마카로니 웨스턴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새로운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
만주 웨스턴은 일제강점기와 개화기를 배경으로 넓은 만주의 황무지를 무대로 한 한국식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다. 주로 독립군, 마적, 일본군 등이 등장한다. 대표 작품으로는 이만희 감독의 1971년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가 있다. 이 영화는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이 새겨진 티베트 불상을 둘러싼 세 명의 조선인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렌치코트와 가죽 재킷처럼 웨스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상을 활용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이 예에 속한다.
라멘 웨스턴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웨스턴 장르로 사무라이의 등장과 일본 특유의 개그 코드를 활용해 차별화된 매력을 선사한다. 1985년작 이타미 주조 감독의 ‘담뽀뽀(Tampopo)’를 홍보할 때 ‘라멘 웨스턴’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됐다. ‘담뽀뽀’는 라멘이라는 음식을 차용했지만 악당과의 대결, 도전과 갈등, 정의와 보복, 주인공의 여정 등 서부극의 기본적인 주제를 따른다.
레드 웨스턴은 적백내전 시기의 1920~1930년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다. 공산국가에서 제작된 서부극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영화는 블라디미르 모틸 감독의 ‘사막의 태양(White Sun of the Desert·1970)’이 있다.
이 외에도 인도의 커리 웨스턴, 스페인의 파에야 웨스턴, 호주의 미트파이 웨스턴, 프랑스의 바게트 웨스턴, 서독의 자우어크라우트 웨스턴 등 다양한 하위장르가 있다.
정하은 기자 chung.hae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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