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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진짜 나를 찾기

수필

 
최근 법정 스님이 창설한 시민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가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짜 나를 찾아라’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법정 스님의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스님이 생전에 강조한 절제, 친절, 공생 등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자기 존재를 깨닫고, 현재에 충실하게 살 것을 강조한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로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법정 스님의 어록에는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친절에는 한도가 없다. 무한히 펴서 쓸 수 있는 우물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옛날과 달라서,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온다”  “삶은 미래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등 현대인에게 맑고 향기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다. 곱씹을수록 깊은 의미가 우러나는 말들이다. 이 책을 읽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나의 내면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병적으로 수줍음이 많았다. 체육 시간이면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간 ’부루마‘라는 체육복을 입어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체육 시간이 정말 싫었다. 또 자신감이 없어서 항상 남이 원하는 나로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려 애쓰며 거절할 줄을 몰랐다. 친구가 영화 본 이야기를 하면 나도 본 영화임에도 안 본 것처럼 끝까지 들어주고, 학교 준비물을 이미 샀음에도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다. 그러니 자연히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로 산 셈이다.
 
서울의 변두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학교는 명문 여학교였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부자와 권력자의 딸들이 많았다. 여러 면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학생들 틈에서 점점 기가 죽었다. 시간표에 따라 가방을 싸야 하는데 매일 같은 책을 넣고 다니다 담임선생에게 들켜 교무실로 불려가 매를 맞기도했다.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 꿈 많은 여학교 시절을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우리 시대부터 대학 입시제도가 바뀌었다. 미국의 SAT 같은 국가고시를 보고 그 성적으로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데 시험 보는 날 토사곽란으로 시험을 망쳤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게 됐다. 대학생활에 재미를 못 붙여 학교 배지도 안 달고 다니며 수업엔 빠지기 일쑤였다. 3학년 때였다. 채플 시간 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니 김옥길 총장이 설교를 멈추고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 줄 모르십니까? 밖에서는 그 자리에 앉고 싶어도 형편이 안 돼서 울고 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라며 언성을 높이셨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식으로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젊은 시절을 낭비했다.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말썽꾸러기들과 지내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다. 하루는 손님이 다녀간 후, 큰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왜 목소리가 두 개야?” 어느 것이 내 진짜 목소리인지 나도 모르겠다.  
 
50세 가까이 돼서 남편을 따라 LA로 가게 되었다. 새로운 삶을 자신감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LA에는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예쁘고 유명한 친구가 있었다. 여고 동창에 대학 동기, 같은 과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냈다. 그녀 역시 나의 존재감을 잃게 하였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는데 왜 자존감이 떨어지고 행복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평범한데 내 주위엔 이상하게도 예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나보다 예쁘고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니 스스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사소함과 평범함의 가치를 몰랐다.
 
'꾸뻬씨의 행복 여행'은 한 정신과 의사의 특별한 행복론이 담긴 책이다. 환자 중에는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해결책을 찾으러 진료실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난다.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알기 위한 여정이다. 꾸뻬씨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행복의 진리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그의 여행 수첩에 담긴 행복에 대한 첫 번째 처방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꾸뻬씨가 여행 중에 만난 노승은 “첫 번째 실수는 행복을 목적이라고 믿는 데 있다. 종종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목표로 삼지만,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삶을 즐기고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라고 말했다.
 
어쩌다 60세가 넘어 등단하게 됐다.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내 에세이집 '내 욕심마저 훔쳐간 도둑'이 마침 새로 출간된 김형석 교수의 '100년을 살아보니',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인 '고양이'와 나란히 전시된 걸 보고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삼성동 코엑스몰에 갔다가 우연히 그곳 관광명소인 '별마당 도서관'에 내 책이 진열된 걸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에세이집 출판 후 친구, 지인들의 격려가 나에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각자 타고난 그릇이 있다. 법정 스님의 말씀대로 자기 분수를 깨닫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생 말년에 그토록 열등감에 시달리며 다니기 싫어했던 여학교로부터 모교를 빛낸 동문에게 주는 '영매상'을 받았다. 졸업생은 누구나 탐내는 명예스러운 상이다. 내가 누리는 복의 작은 부분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해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나는 모르고 살아왔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 즉 타인이 원하는 것들만 추구하며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 떠오른다. “무엇이 되든지 자기가 되라. 남의 것을 주워 모으는 모자이크 인생을 살지 말라. 너만의 장인이 되라.”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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