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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인연

[신호철]

[신호철]

인연
 
시간이  
저만치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매일 종착역을 향해  
걷고 있었고
 
 
어느 것 하나  
무게의 추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기에  
가슴에 담아보려다
빈 손짓만 했다
 
 
아직 피지 않은  
작약의 꽃봉오리에 반해
반나절을 뜰에서 놀았다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모나지 않게, 찌르지 않게
 
 
파도는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가는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바다는 그렇게 부서지는데
 
 
설레는 물결
숨 가쁜 기대로  
온종일 뜬눈이다
이슬과 함께 머리 들
당신이 보인다
 
 
[신호철]

[신호철]

 
가벼워지려고 나비를 따라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 그 자리에 바로 네가 있었다. 작은 꽃을 좋아하는 너는 꽃을 다듬는 내내 자리를 지켜주었다. 쇠파리에 물려도 꼼짝없이 버티고 서있던 덕분에, 나비야 나비야를 불러준 덕분에 야생화를 채집 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아프고 간지러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려운 자리엔 항상 네가 이야기처럼 서 있었다. 야생화를 뒤란에 심으면서 고마운 그의 마음을 생각했다. 내년 이맘 때 보라, 분홍의 꽃들이 싱그러운 날. 그 때 일을 기억할 수 있으려나? 빨갛게 부어 오른 그 상처를 호호 불어 줄 수 있으려나?
 
Memorial Day 전후에는 늘 꽃을 심고 다듬어준다. 매년 피어나는 꽃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천방지축 난장판이 된다. 다듬어주고 너무 많이 번진 부분은 뽑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꽃들과 뒤엉켜 볼 품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노랑은 노랑대로, 보라는 보라대로, 분홍, 하얀꽃은 그들대로 뭉쳐 있을 때 더 정리가 되어 보인다.  
 
처음 정원을 가꿀 때는 높낮이를 계산하지 않고 심다 보니 다음 해 자리를 바꿔주느라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낮은 것은 앞쪽에 높은 것은 뒷쪽에 심어야 한다. 바람과 비에 쓰러지기 쉬운 꽃들은 받침대를 세워주고 꽃망울이 너무 많이 맺은 작약은 한 대궁에 두 세 개만 남겨두고 잘라 주어야 한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뻗어나간 가지들을 그대로 두면 이듬해면 나무의 형태가 엉망이 된다. 그때마다 잘라 주어야 한다. 잎사귀가 유난히 많이 자란 가지도 다듬어주고 나무 밑둥에서 뻗어나온 가지는 미련 없이 제거해야 나무가 곧게 자라게 된다.  
 
정원을 가꾸면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꽃들과도 인연이 없으면 서로의 정원에서 자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애지중지 키워도 다음해 봄 싹을 내지 않는 꽃들도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는 시름시름 해도 햇빛이 잘 드는 남향에 심으면 다음해 무섭게 꽃대를 들고 일어나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을 나는 꽃과의 인연이라고 말하겠다.  
 
사람들 과의 인연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끝까지 갈 것만 같았던 친구도 어느 날 서로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우연히 만났어도 그 인연이 오래 깊이 유지되기도 하는 것을 살면서 느끼고 있다. 인연은 서로의 눈에 띄는 것이다. 인연은 서로의 마음에 오래 남아 서로의 풍경과 일상에 어우러지는 것이다. 부족하거나 남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서로에게 채워지는 것이다.  
 
이른 봄 눈 속을 헤집고 피는 꽃들도 있다. 가냘프고 나직한 잎을 달고 자라는 것들은 그들대로 서로에게 기대 봄을 부르고 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목련의 애처로움은 그 목이 꺾여 땅 위에 떨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과꽃이 그렇고 국화가 또 그렇다. 서리가 내릴 때까지 그 색을 잃지 않는 일편이 있다.  
 
꽃과 사람만이 아니다. 풍경 또한 그렇지 않을까. 풍경도 인연이다. 살아 가는 동안 풍경과의 인연은 우리의 걸음을 그리로 향하게 한다. 늘 그 자리에서 인연을 기다리며 봄에는 연두로 초록으로 자라고, 보라로 노을지는 지고 지순한 풍경이 되어준다. 장대비를 쏟으며 폭설을 뿌리기도 하고 잔잔한 파도로 출렁이기도 한다.
 
오늘도 당신과의 인연으로 새벽이 오고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노을이 졌다. 별이 뜨고 나는 그 별빛 아래 풍경처럼 서 있다. 꽃들이 한없이 어여쁜 이유도, 네가 소중한 이유도, 발걸음이 자꾸 같은 풍경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인연 때문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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