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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네고

‘네고’는 참 이상한 말이다. ‘negotiation’의 처음 두 음절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삭제된 콩글리시다. 미국인들이 ‘deal’이라는 일상어를 쓰는 데 반하여 우리는 굳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유식한 단어를 쓴다.
 
‘니고시에이션’이라 발음하는 이 어려운 말을 사전은 ‘협상, 교섭, 절충, 협의’ 따위의 한자어로 육중하게 풀이한다. 물건값을 깎으려고 흥정하는 장면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다. 클린네고, 케이블네고, 先네고, 네고王 같은 잡탕 어휘가 언어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한다.  
 
남들과 마음을 절충하는 과정을 그룹테러피의 주제로 삼는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deal’, 딜, 거래(去來)를 해야한다는 야무진 의견이 나온다. 나는 그 말에 집중한다. 거래는 갈 去, 올 來, 가고 온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금전 거래’가 머릿속에 얼핏 떠오른다.
 
상거래(商去來)만 거래가 아니다. 사전에는 ‘주고받음, 사고팖’ 외에도 ‘친분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오고 감’이라 나와 있다. 서로 낯이 선 타인들 사이에 친분이 오고 가는 신기한 현상은 둘 앞에 가로 놓인 강을 건너는 튼튼한 다리의 쌍방통행을 전제로 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딜이 깨지는 경우는 일방통행이 이유일 때가 많다.
 
당신과 내가 무심코 나누는 대화의 바닥에 네고 의식이 깔린다. 더 나아가서, 비언어적 의사소통에도 모종의 딜이 숨어있다. 동물들, 이를테면 두 강아지 사이에 순식간에 네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벽에 못을 박을 때조차 못, 장도리, 그리고 못을 때리는 힘 사이에 적절한 네고가 이루어져야 한다니까.
 
‘deal’은 전인도유럽어에서 유래한 고대영어로 ‘나누다, 분배하다’라는 뜻이었다. 카지노 딜러가 노름꾼 앞으로 카드를 척척 나눠주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 짤막한 말은 당신이 믿기 힘들겠지만 14세기에 성교한다는 뜻으로도 쓰였다가 15세기에 들어서서 누구를 ‘대한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됐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대한다. 대면(對面), 대화(對話), 또는 대결(對決)하면서. 1960년도 중반에 시작하여 일상어가 된 ‘big deal’은 우리말로도 그냥 ‘빅딜’이라 하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대인(對人)관계가 좋아야 빅딜이 자주 일어나듯이 사람이 먼저고 돈이 나중이다.
 
그룹테러피에서 좀 힘이 들 때가 있다. 유물론에서 유심론으로 화제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부득이 물건값을 깎는 차원을 벗어나서 사람이 사람과 소통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하여 말한다. 그룹멤버들의 반응이 줄어들고 나는 무슨 강연을 하는 기분이 든다.
 
‘negotiation, 네고’의 첫소리 ‘neg’는 ‘아니’라는 뜻. ‘negative’의 첫소리와 같다. (neg=not) 이 말은 전인도유럽어에서 ‘쉽지 않다, 한가롭지 않다’는 의미였단다. 세상 어떤 비즈니스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쉽거나 한가로울까나.
 
왜 네고라는 말을 끄집어냈나 하는 질문이 생긴다. 하다못해 ‘compromise, 타협’이라는 영국식 컨셉도 있지 않은가. 나중에 슬쩍 그 이유가 떠오른다. 한국말에 자주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타협’은 어딘지 꼰대스러운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유물론적 사고방식과 한국식 도전의식에 걸맞는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시대정신과 단어선택 사이에 네고가 가능하냐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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