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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내가 너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토요일 오후, 종잡을 수 없는 봄 날씨였다. 뉴욕에 사는 친구와 함께한 갤러리를 찾아갔다. 전시실 가운데 이불 수백 개가 포개져서 천정까지 올라가 있다. 컴포터, 담요, 퀼트, 손뜨개 등 온갖 종류의 이불이 사각으로 접혀서 탑을 만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이불마다 가격표보다 조금 큰 쪽지가 붙어 있다. 쪽지에는 이불을 보낸 사람의 이름과 사는 곳, 사연이 적혀있다. 콜로라도, 일리노이, 샌디에이고 등 전국에서 보내왔다. 다음은 한 쪽지에 적힌 내용이다.  
 
‘나의 이름은 페트리샤. 나의 엄마는 15살이 되기 전에 엄마와 할머니를 모두 잃었다. 그들은 다행히도 죽기 전에 엄마에게 크로켓 뜨개질을 가르쳐 주었다. 엄마는 슬픈 날이나 기쁜 날이나 손에서 뜨개질을 놓지 않았다. 그 후로 가족의 중요한 행사에 손뜨개 한 이불을 선물하곤 했다. 누구나 엄마의 손이불을 받으면 기뻐했다. 우리는 아이오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다. 나는 우리 가문에서 최초로 대학에 간 영광스러운 아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기숙사로 떠날 즈음, 엄마는 밤새워 뜨개질을 시작했다. 떠날 날이 되었지만, 엄마는 한 귀퉁이를 마치지 못했다. 이불은 조금 찌그러진 사각형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부분, 엄마가 짜다가 만 그곳에 코에 대고 밤에 잠든다.’
 
이불을 쌓아 올린 작가 마리 와트(Marie Watt)는 세네카 인디언과 독일계통의 혼혈이다. 마리의 엄마는 어린 시절에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엄마는 자신의 언어는 잊었지만, 딸인 마리에게 세네카 부족의 신화를 들려주었다. 하늘에서 한 소녀가 땅으로 떨어지던 중에 거북이가 나타났다. 소녀는 거북이 등에 타고 포틀랜드 땅에 무사히 안착했다. 마리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으로는 헝겊을 만지작 거라곤 했다. 엄마가 이어서 만들어준 헝겊 이불에 천착하다 보니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이불들을 모아서 전시하게 되었다. 아픈 친구가 죽을 때까지 덥던 이불, 쌍둥이 형제가 헤어지면서 나눠 가진 이불. 이불 틈에는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의 숭고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나는 가끔 나의 부모님이 사셨던 격동기의 한국을 상상한다. 어느 날 아침 외출을 나갔다가 쓰러져 숨을 거둔 아버지가 그날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이야기를 듣고 혈압이 올랐을까? 궁금한 점이 꼬리를 문다. 어머니는 어렴풋이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도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무엇이라도 남아 있다면, 편지든 메모든… 침묵 속으로 영면한 사연은 알 길이 없다.  
 
“할머니의 엄마는 어떤 분이야?” 어느 날, 8살 손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또 이렇게 묻기도 한다. “정말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어?” 한글 학교에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역사가 옛날이야기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역사 시간과 한국 음식 먹는 시간이 제일 좋다고 한다. 손녀는 언젠가는 한글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또 그러고 나면, 누가 아는가. 나의 어느 후손이 미국에 건너온 선조에 관심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끄적거리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내 이야기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오늘 첼시의 한 갤러리에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글 한 조각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기록이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고유의 가치가 있다.  
 
마리 와트의 이불 작품에는 ‘너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나의 이야기도 변한다. (My story changes when I know your story)’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어느 먼 훗날, 책상 서랍 혹은 먼지 낀 책장 구석에서 나의 글 조각이 툭 튀어나온다면, 그것을 후손 중 누군가가 읽어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더 알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확장할지 누가 알겠는가.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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