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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솔베이 회의

박종진

박종진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벨기에의 화학자이자 세계적인 화학 소재 전문 기업인 솔베이사를 세운 사업가였다. 식음료, 치약이나 비누를 만들 때 쓰는 수산화나트륨은 소금물을 전기 분해하거나 암모니아 소다법이라는 두 가지 공법으로 만들 수 있다. 수산화나트륨은 가성소다라고도 하지만, 우리말로는 양잿물이라고 하는데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그 중 두 번째 방법으로 수산화나트륨을 만들어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솔베이 학회를 창설하고 전 세계 물리학자와 화학자를 초청하여 3년마다 회의를 열었다. 가장 최근에 제29차 솔베이 회의가 2023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렸다.
 
1911년에 시작된 모임은 1927년 제5차 솔베이 회의 때 그 정점을 찍었다. 제5차 솔베이 회의의 주제는 전자와 광자였는데 여기서 양자역학이 시작되었다.  
 
이때 초청된 29명의 학자 중 17명이 노벨상을 받았지만, 홍일점이던 마리 퀴리 여사가 물리학과 화학 양쪽에서 상을 탄 까닭에 노벨상은 총 18번 나왔다. 유사 이래 그렇게 많은 석학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모임이었다.
 


최고령자는 190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74세의 헨드릭 로렌츠였고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은 193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25세의 폴 디랙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찍은 유명한 사진 속에 당시 전성기였던 48세의 아인슈타인이 앞줄 한가운데 앉았고 그 옆에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가 자리했다. 맨 뒷줄에는 고양이 상자 실험으로 유명한 슈뢰딩거와 불확정성의 원리에 빛나는 하이젠베르크가 서 있다.
 
이 회의에서 고전물리학을 대표하는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학파를 이끈 닐스 보어가 서로 날 선 경쟁을 벌였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더니 세계 과학의 판도는 아인슈타인을 버리고 닐스 보어가 주장한 양자역학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세가 기울자 아인슈타인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3년 후를 기약했지만 결국 양자역학에 밀리고 말았다.  
 
1930년에 열린 제6차 솔베이 회의 때 아인슈타인은 자기를 찾아온 젊은 가톨릭 신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로 빅뱅 이론을 주창한 조르주 르메트르였다.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이론을 듣자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정적인 우주를 생각했지만, 그 당시 태동한 빅뱅 이론은 우주는 정적이 아니라 팽창한다는 것이었다.  
 
몇 년 후 에드윈 허블이 팽창하는 우주를 증명해 내자 자신이 틀린 것을 인정한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이론이 훌륭하다고 인정했는데 두 사람은 끝내 어정쩡한 사이로 지냈다고 한다.
 
모든 자연현상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고전물리학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양자역학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미시세계는 정확하게 측정하거나 예측할 수 없고 그저 확률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화를 냈다. 과학은 100%이어야 하는데 원자 주위에 전자가 존재할 확률이 90% 되는 곳이 전자의 위치라는 말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하면서 대세는 완전히 기울었는데, 입자는 그 위치를 알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알면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이론으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제5차 솔베이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이었다. (작가)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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