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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

[신호철]

[신호철]

햇살이 좋은 날 아침이다. 2층 창문 가까이 홍매화도 연분홍 꽃봉오리를 가득 맺고 있다. 쑤욱 쑥 올라오는 새싹들, 나뭇가지마다 맺은 잎눈들로 거리는 온통 봄기운이 가득하다. 이제 막 나지막한 언덕 넘어 얼굴을 내민 해는 긴 햇살을 창문 안으로 길게 뻗고 있다. 창문을 너머 상쾌한 공기. 마음 속까지 연두 봄빛이 적셔온다. 오늘 이렇게 하루가 열리고 있음을 감사한다. 이 벅찬 하루를 날마다 물들이며 맞이하고 싶다.
 
해가 떴으니 지는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또 밤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내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라는 페이지는 소리 없이 넘겨질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 만나고 나누었던 대화들, 함께 걷고 바라보았던 미시간 호수의 파도의 결까지,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아 봄을 기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마저 어제라는 굴레 속으로 켜켜이 간직될 것이다. 따뜻한 손잡음의 기억도, 그윽하고 편안한 얼굴 표정과 발걸음의 즐거움조차 이제는 기억을 되살려 돌아보게 될 어제가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학교를 가기 위해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고개는 그리 높지 않아 성큼 고개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언덕 오른편에 사람이 들어갈만한 커다란 굴이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굴속에 귀신이 산다고 이야기했다. 그것도 육이오 때 죽은 처녀 귀신이라는 이야기가 흉흉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다니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사람이 지나갈 때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고 했다. 대낮엔 괜찮지만 어둑해지는 저녁이나 밤에는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고 긴 거리를 돌아서 갔다. 어쩔 수 없이 어둑한 그곳을 지날 때에는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기도 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바람소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도 절대 서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 고개를 뛰어 내려가기도 했다.
 
이곳 시카고에서 처음 영화관에서 관람한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Ghost’란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과 영혼’이란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몰리를 뒤에서 안으며 샘은 사랑을 고백한다. 불행하게도 싸움에 연루된 샘은 괴한의 총에 죽음을 맞이한다. 몰리를 떠날 수 없는 샘은 Heaven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Ghost로 슬픔 속에 살아가는 몰리의 곁에 남게 된다. 주제곡인 언체인드 멜로디와 함께 펼쳐지는 가슴 아픈 사랑의 모습, 끝까지 몰리를 지켜주는 샘의 헌신적인 사랑은 전 세계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차를 타고 가다 길 건너 노란 개나리꽃 무덤이 보인다. 차를 길가에 주차하려다 뒤에 따라오는 차들 때문에 아쉽게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우아한 개나리 풍경에 머릿속이 온통 노랗게 변해버렸다. 오른쪽 창문으로부터 밀려 나가기 시작한 풍경은 뒷창문을 마지막으로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소실점을 찍으며 사라진 노란 풍경은 하늘 위에 한 영혼의 기억과 얼굴을 남겨 놓았다.
 
클래식과 재즈를 섞은 듯한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이란 곡을 듣다가 바이올린의 피치카토 소리에 반해버렸다. 이 곡은 작곡가 윌리엄 볼컴이 댄서였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작곡한 피아노 연주곡인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의 특이한 해석으로 우아함과 톡톡 튀는 감성으로 무서운 유령이 아닌 우아한 유령의 춤과 몸짓의 유희를 상상시키고도 남는 매력적인 연주였다. 1시간 연속 듣기로 콧노래로 따라 부를 정도로 친숙해졌다. 피아노 연주로도 들어봤지만 역시 바이올린 선율로 끌어오는 감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내 유아 시절의 유령에 대한 인식을 ‘Ghost’란 영화로 돌려놓더니 이젠 ‘Graceful Ghost’로 유령에 대한 친밀감과 기대감을 유발시키고 있다. 노란 개나리 꽃무덤이 눈길을 끈 오후 내내 어깨춤을 추며 휘파람으로 ‘우아한 유령’을 따라 부르고 있다. 하늘엔 옅은 눈발도 춤추며 흩날리고 있다. (시인, 화가)
 

Kevin Rho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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