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남편은 할머니에게 내일은 보청기를 꼭 하고 나가라고 했다. 다음 날 할머니는 한껏 멋을 내고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보청기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들리는 남자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갈치가, 천 원!” ‘갈치가 천 원’이라는 생선 노점상의 외침을 ‘같이 가 처녀!’라고 잘못 들었던 것이다.
나이 들면서 청력을 잃어가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슬픈 현실을 유머로 승화시킨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초고령화 시대로 치닫고 있는 일본에서 이런 이야기만 모은 책이 나왔다. ‘센류’라는 17개 음으로 된 짧은 정형시 형식에 노인들의 체험에서 나온 위트와 풍자를 담은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시들이 실렸다.
‘종이랑 펜 / 찾는 사이에 / 쓸 말 까먹네’ ‘개찰구 안 열려 / 확인하니 / 진찰권’ ‘세 시간이나 / 기다렸다 들은 병명 / 노환입니다’ ‘일어나긴 했는데 / 잘 때까지 딱히 / 할 일이 없다’ ‘(요전에 말이야) / 이렇게 운을 뗀 / 오십 년 전 이야기’ ‘만보기 숫자 / 절반 이상이 / 물건 찾기’ ‘미련은 없다 / 말해놓고 지진 나자 / 제일 먼저 줄행랑’ ‘이 나이쯤 되면 / 재채기 한 번에도 / 목숨을 건다’
일본의 ‘전국 유료 실버타운협회’ 주최로 2001년부터 매년 열리는 센류 공모전에 응모한 11만 편의 센류 중에서 엄선된 88편을 모아 만든 이 책이 100만 부 가까이 팔리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 책에 담긴 시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여겼다는 뜻이다.
책에 수록된 시 중에서 하나가 제목이 되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책 제목이다. 심장이 뛰길래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었다는 허무한 결말에 나이 듦의 서러움마저 전해진다. 책에 담긴 익살맞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까닭은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내 주위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식당에 가면 밥 한 끼 사 먹을 돈은 있는데, 계산서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가 보이지 않아 애를 먹는다. 시계가 없어진 줄 알고 한참을 고민하다 손목에 고스란히 매달린 것을 보고 안심하는 순간,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또 다른 불안감에 휩싸인다. 무슨 말을 하려다 잊어버린 채 멍하니 서 있을 때면 나도 그 책에 시 한 편 응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렇게 나이 드는 게 인생이라면 조금은 유쾌하게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실수가 점점 더 많아지더라도, 깜빡거리는 정도가 심해지고 그 횟수가 잦아질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존재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고 안타까워하기보다 부정맥일지라도 심장이 뛰고 있음에 감사하며 살자.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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