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세상만사] '애니깽' 슬픈 이름

애니깽이란 멕시코에서 재배하는 용설란 나무를 말한다. 원래 명칭은 ‘에네구엔(Heneguen)’ 이지만 발음을 잘못한 것이다. 나무의 잎은 길쭉하고 그 껍질을 잘라 삶아서 심줄을 뽑아내 선박용 로프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뿌리 부분은 데낄라 술 원료로 쓰인다. 이처럼 부가 가치가 높은 작물이라 과거 한국인을 농장 노동자로 고용했다.
 
1905년 4월 4일 한국인 남자 802명과 여자 209명 그리고 어린이등 총 1033명은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그리고 1905년 5월 15일 멕시코 유카탄주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하여 메리다 등지의 25개 농장으로 흩어졌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농장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목표량을 못 채우면 채찍질을 당하는 등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새벽에 시작된 일은 밤늦게야 끝났는데 한국인들은 스페인 어 교육을 받지 못해 소통조차 어려웠다. 당시 중국인 허이후씨가 황성신문에 멕시코 한국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려 국내 여론이 들끓었지만 망해가던 대한제국 정부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1909년 5월로 4년간의 계약이 끝났지만 일제 강점으로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길도 없었다.
 
그들 중 약 300여 명은 쿠바로 떠났다. 유카탄의 한인들과 쿠바로 떠난 한인들은 적은 돈이지만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 앞으로 독립자금을 보낸 기록도 있다. 대한국민회 유카탄 지부와 쿠바 지부를 열고 한인의 정체성을 교육하고 민성국어학원을 열어서 한글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유카탄과 쿠바에 정착한 한인들 중 재계나 문화계, 정치계에 흔적을 남긴 한인은 거의 없다. 그들인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빈한한 삶을 살았던 그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고국은 너무 멀고 일제의 강점 상황에 있었다. 그만큼 불운한 세상을 살다 가신 분들이었다.  
 
지금 그 지역과 주요 대도시에는 5세, 6세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인사가 방문하면 한인 후손인 어린이들이 한복을 입고 꽃다발을 전달하지만 행사 때뿐 평소에는 모일 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 그리고 그곳에서 견디지 못하고 쿠바로 탈출한 한국인들은 꿈속에서만 고국을 그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신 분들이다. ‘애니깽’은 한국인 노동자의 슬픈 이름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 그분들의 고혼을 위로하며 명복을 빌고 빈다.

김호길 / 시인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