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심리치료
‘사고현장’ 이라는 내 시의 일부다.
나는 약물치료에 치중하는 정신과 의사를 ‘약사(druggist)’라 부른다. ‘druggist’라는 앵글로색슨어는 ‘pharmacist’라는 라틴어보다 소탈하게 들리지만, 길거리 마약도 ‘drug’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
되도록 심리치료에 의존하는 정신과 의사를 ‘psychotherapist’라 한다. 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지만, 심리는 추상적인 컨셉이다. 약을 신봉하는 의사를 ‘유물론자(materialist)’, 심리치료를 추구하는 의사를 ‘유심론자(mentalist)’라 부르면서 유사시에 처방을 내리는 유심론자임을 나는 자처한다.
언어 감각이 뛰어날수록 심리치료가 유효하다. 전혀 그렇지 못하면 처방전을 쓴다. 어린이보다 교육수준이 높은 어른이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에 적합하다는 것.
심리치료에 몰두한다. 환자가 꿈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해서 턱을 어루만진다. 지난밤 꿈이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로 그 ‘소원성취’의 좋은 본보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뛸듯한 기쁨과 아픈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을 공유한다. 환자가 꿈의 상징성을 스스로 감지하고 자기 꿈을 해석한다. 상징의 범위는 개인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단무의식’ 또한 간간 등장한다.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동창생이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거나 비를 피하여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꿈들.
당신은 프로이트의 명언을 들먹인다. “때로 시가는 단지 시가일 뿐이다.” 그리고 ‘시가=남근의 상징’이라는 판박이 공식을 비판하려는 눈치다. 우리의 초롱초롱한 의식, 어렴풋한 잠재의식, 캄캄한 무의식, 무심코 내뱉는 언어 속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상징의 내막, 영원불멸의 예술작품에 내재한 저 무수한 상징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나는 반박한다. 한두가지 예외 때문에 전반적 통계를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을 만질 수 있는 물체로 보는 유물론자들을 어찌 무마할 수 있을까.
1977년에 하버드 의대가 꿈에 대한 논문, ‘활성-합성 이론(Activation-synthesis Theory)’을 발표했다. 우리가 깊은 잠을 잘 때 뇌 속에서 활성화되는 전기현상을 대뇌피질이 인위적으로 해석해서 창조하는 합성체가 꿈이라는 것. 꿈은 꾸며낸 스토리라는 것.
2010년 위스콘신 의대가 ‘꿈꾸기와 뇌’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외친다. “결론적으로, 꿈의 의식은 깨어 있는 의식과 아주 비슷하면서, 의지, 자아 인식, 성찰, 숙고, 무드, 기억과 흥미진진한 차이점이 있지만, 각 개인의 꿈에는 많은 다양성이 있다.” 꿈=생시. 삶=꿈.
2014년 대학 동기 여럿이 하와이 여행을 간다. 화산의 지열이 수증기처럼 솟아오르는 마우이 섬에서 사진을 찍는다. 10년 전, 어제, 지금, 나는 꿈을 꾼다. 내일이라는 꿈을 꾸며낸다. 내 옛날 시 ‘사고현장’만큼이나 생생한 꿈을 연출한다. 하나의 상징으로 남기 위한 꿈을.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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