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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감미로운 낭만을 위하여

이기희

이기희

눈이 온다 또 온다. 얼마나 오래 올 건지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창 밖을 바라본다. 눈이 오면 제 꼬랑지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려고 마루는 앞마당을 뛰어다녔다. 삼만이 아재는 마당에 수북한 눈을 모아 동네에서 제일 큰 눈사람을 만든다. 옥이언니는 당근으로 코를 만들고 숯덩이로 눈을 그렸다. 손재주가 좋은 아재가 사랑채에 엮어 매단 강냉이를 낫으로 다듬어 입을 만들면 눈사람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냉이 낱알들이 눈사람의 이빨처럼 햇볕에 반짝였다.
 
리사는 눈만 오면 윈트 원더랜드(Winter Wonderland)라고 좋아한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담장 아래 쌓여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을 보며 손뼉을 친다. 겨울왕국에 나오는 공주가 되어 꿈과 환상의 나라로 빠져든다. 기분 좋은 날은 종이 왕관을 쓰고 엘사가 부른 겨울왕국의 주제곡 ‘Let It Go’를 흥얼거린다. 동생 안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마법을 감추며 숨어살던 엘사가 지난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표방하는 노래다.  
 
‘Let it go, let it go / Can’t hold it back anymore (중략) / Turn away and slam the door(떨쳐버릴 거야, 떨쳐버릴 거야. 더 이상 감추고 살 순 없어 / (당당하게) 돌아서서 문을 닫아버릴 거야)’ 마법에 걸려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향해 부르는 엘사의 노래는 콤플렉스를 감추고 사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면 미래로 갈 수 없다.  
 
온종일 두 뺨이 빨개져서 주먹만 한 눈뭉치로 눈사람 만드는 리사를 보며 오늘 하루 온갖 시름 눈 속에 묻고 나 홀로 낭만(浪漫)에 젖기로 한다.  
 


‘굿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중략) /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중략)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을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중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콧등이 빨게 지도록 하루 종일 함께 걸은 남학생 생각이 난다. 연모를 눈치챈 친구가 첫눈 오는 날 견우직녀가 만날 까치다리를 놓았다. ‘첫눈 오는 날 경북대 뒷산, 가 보면 누군지 안다.’ 이 쪽지를 가슴에 품고 눈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실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검정색 교모 쓴 얼굴 하얀 그 남학생을 만나러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쏜살 같이 달려갔다. 그 때는 핸드폰도 없어 연락 불통, 어른들 눈에 띄면 “어린 것들이 공부나 하지”라는 훈계 받는 시절. 뒷산은 황무지처럼 넓었다. 얼굴은 아리송한데 저 멀리 눈밭을 헤치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기루처럼 다가오는 얼굴. 할 말도 없고 물을 말도 없어 그냥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 도시의 끝에서 수성못 끝까지 수십 번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헤어질 시간!  집까지 오자 돌연 물었다. “의대에 합격했는데 해양선을 타고 싶어. 네가 원하면 해양선 안 타고 의대에 갈 거야’라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눈치 없는 내 대답! 첫눈 오는 날의 내 첫사랑은 그 길로 파토가 났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남학생은 마도로스가 됐다.
 
겨울왕국의 안나의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에 울라프는 “괜찮아, 내가 아니까, 사랑은 누군가를 너보다 먼저 두는 거야.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네가 원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 멋진 대답을 했다면 운명이 달라졌을까.
 
‘몰라서 걸어온 그길/ 알고는 다시는 못 가 / 아파도 너무나 아파/ 사랑은 또 무슨 사랑’ 윤수현의 노래 ‘꽃길’을 시로 읊으며 눈 내리는 날의 감미로운 낭만을 접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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