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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산행, 그 첫걸음

“어려운 부탁인데, 저도 산행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오랜 망설임 끝에 최근 알게 된 지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야외 활동보다는 실내에서 지내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건강 관리를 위해 인생 후반에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큰 용기를 내본 것이다.    
 
나름 간절한 마음에 부탁은 했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웃도어 활동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오히려 불가하다는 답이 오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오래 걸리지 않아 지인이 속해 있는 하이킹 클럽 정기 산행에 참석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덜 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승낙을 받고 보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땀 흘리며 산 오르는 모습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실제 산행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러 회원과 동반 산행이라니. 좋기도 했지만 약간 어리둥절했다. 과연 이 산행이 계기가 되어 평범한 내 일상에 어떤 변화가 찾아와 줄까?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궁금해졌다.  
 
산행 일은 다가오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히말라야 트레킹도 가능한 장비를 갖추고 산에 오르더라”는 오래전 한국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첫 산행이지만 초보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우선 유튜브와 각종 매체를 검색하면서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이것저것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확인하려다 보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꾸물거릴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가까운 아웃도어 스포츠용품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등산화와 배낭 등 몇몇 장비를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산행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갈 즈음, 산에 오르다 맞닥뜨릴 수 있는 갖가지 해프닝과 위기 상황에 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산에 갔다가 곰과 마주쳤는데 당황하지 않고 여러 명이 함께 소리를 질러 곰을 쫓았다는 이야기나, 꼬리에서 방울 소리를 내는 파충류와 한참 동안 눈싸움을 벌였다는 등의 무용담들은 모두 지어낸 것이니 절대 따라 하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 등이었다. 게다가 내가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산행 도중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부상위험에 대해 마치 자기가 수없이 겪어본 것처럼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잔뜩 겁을 주기도 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나무 사이로 걷는 기분은 어떨까? 미국 산에는 서너 명이 손을 맞잡아도 모자랄 정도로 굵직한 나무가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일까? 특히 이곳 LA는 낮의 햇빛이 몹시 강해서 그늘 없는 산길을 걷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런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그늘로 뒤덮인 오솔길로 접어드는 반전도 있을 거야. 그 길에서 몸과 마음을 식혀주는 차가운 바람과 마주친다면, ‘아! 시원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후 별다른 만남이나 자극 없이 지낸 나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지냈기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 지난날 찍은 사진 배경이 늘 비슷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집 안 아니면 집 앞마당이 내 사진 배경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런데 산행을 하다 보면 이전에 없던 색다른 배경이 내 사진에 등장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서 있는 나, 운치 있는 산길을 걸어가는 내 뒷모습, 동반인들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는 장면 등등.
 
물론 모든 산행이 아름답고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길을 걷다가 숨이 가빠지면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동행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상처받는 경우도 있겠지. 인생길이든 산길이든, 결국 혼자 걷는 것이라는 생각에 허무감이 밀려드는 때도 있을 거야.
 
아무튼 그날이 밝았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잠을 설치는 바람에 몸이 개운치 않았다. 어제저녁 미리 챙겨 둔 배낭을 메고 다소 이른 시간 집을 나섰다. 해뜨기 전 아침이라 공기는 신선했다.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있는 내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 며칠간 푹 빠져 있던 나만의 환상과 낭만을 좇아 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산을 오르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산책할 때 생각할 주제를 하나씩 품고 길을 나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게도 그런 주제 하나쯤은 있을 텐데 갑자기 만들려다 보니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산행 출발 장소로 데려다줄 버스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두 해 전쯤 한국에 갔다가 우연히 들렀던 한 북카페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열된 책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던 나는 낮은 천장에 매달린 특이한 나무 액자에 눈길이 갔다. 그 순간 무엇인가에 홀린 듯 걸음이 멈췄다. 목판에는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시를 속으로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짧은 시 한 구절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내가 걸어온 삶이 스스로에게 행복해 보였던 적이 있었나?’ 내 삶의 여정 전부를 한순간에 돌아보게 한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 나무판에 새겨진 구절을 나의 첫 산행 주제로 삼아 볼까?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구절을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행복해 보일 때까지,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제이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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