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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꽃피는 겨울 나그네

이기희

이기희

금이 간 장독으로 장을 담글 수 없다. 장은 모든 음식의 밑간이 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입동(立冬) 무렵 음력 10월 또는 동짓달이 되면 동네 아낙들이 우리집 부엌에 모여 장 담그기 할 메주를 쑨다. 가마솥에 물을 넉넉히 부어 솥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콩을 삶는데 메주콩 비린내가 나지 않게 한번 불에 올린 솥은 끓어 넘치더라도 뚜껑을 열지 않고 뭉근하게 뜸을 들인다. 탁탁 장작 타는 소리와 타오르는 불길로 내 두 뺨은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오른다. 잘 삶은 콩은 둥글게 빗어 달라붙지 않도록 꾸덕꾸덕해질 때까지 겉말림을 한 뒤 새끼줄로 엮어 통풍이 잘 되는 삼만이 아재 방 천장에 매달아 띄운다.  
 
정월달 날씨 좋고 손이 없는 날, 어머니는 장 담글 준비를 한다. 장 담그는 일은 일년 농사만큼 안주인에겐 중요한 일이다. 장은 가족의 일년 양식이다.  
 
명주보자기로 머리를 싸맨 어머니는 며칠째 병정처럼 줄지어 선 장독들을 아기 머리 감기듯 조심조심 씻는다. 어떤 장독은 내 키보다 크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장독에 햇빛이 닿으면 눈앞에 별사탕이 우르르 쏟아진다.
 
모든 것은 정성이다. 사랑도 가족도 장 담그는 일도. 사람 사는 모든 것이 정성이다. 허투루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은 준만큼 받는다. 안 주면 못 받는다.  
 


오색 찬란한 사랑의 꽃다발도 시들면 향기가 사라진다. 린타나 꽃은 한송이에 여러가지 색깔의 꽃이 핀다. 사랑은 꽃과 같다. 피고 지고 다시 핀다. 거미줄에 걸려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있고 독약을 삼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운명적이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황홀하지만 유효 기간이 짧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사랑에 빠지면 곧이 듣는다. 사랑은 환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안과에 가도 치료가 불가능하다.  
 
장미라고 똑같은 장미꽃은 아니다. 여러 갈래의 사랑을 노래한다. 장미와 비슷한 ‘리시안 셔스’의 꽃말은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해바라기는 ‘당신만을 바라봅니다’로 ‘일편단심, 동경, 기다림’이다. 올망졸망한 미니 장미는 ‘끝없는 사랑’이다. 빨간 장미는 ‘낭만적인 사랑’이고 핑크 장미는 ‘사랑의 맹세’다. 주황색은 ‘첫사랑의 고백’이고 흰장미는 ‘사랑, 평화, 순결’을 의미하는데 프로포즈용으로 적합하다. 청순하고 고급스러운 카라는 ‘천년의 사랑, 순수, 순결’을 뜻하는데 다섯송이 카라를 바치면 ‘아무리 봐도 당신만한 여자는 없습니다.’라는 순종을 의미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빨강색 튤립은 ‘사랑의 고백’이다. 불행하게도 아무도 내게 튤립을 바친 사람이 없다. 사랑도 자급자족이 되면 족하다. 해마다 튤립 구근을 앞뜰에 심는다. 봄이 오면 사랑을 고백하듯 제일 먼저 목을 내미는 튤립은 여왕처럼 고귀하다. 보라색 튤립은 ‘영원한 사랑’ 분홍은 ‘애정’ 주황은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다. 이 풍진 세상에 모든 꽃들의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은 천재이거나 바보다. 어차피 사랑은 미친 굿판, 신들린 듯 사랑할 때가 가장 매혹적이다.
 
나는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섞인 꽃다발을 좋아한다. 딸은 생일날이나 명절에 빠짐없이 꽃을 보낸다. 아들은 누나가 보내는 카드에 제 이름 적어 달라고 부탁하는 얌체족이다, 장가 가더니 일장월취, 크리스마스 리스를 매년 보낸다. 솔냄새가 좋아 집안에 걸어놓고 아들 며느리 손주가 그리우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세월이 장 맛을 달달하게 만든다. 며칠 남지 않은 달력의 빈칸에 동그라미 그리며, 사랑의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흩어져 다시 돌아오는 계절따라 겨울나그네의 길을 떠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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