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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바람떡

옛날에 정신치료에 심취한 적이 있다. 남들을 대할 때 손에 땀이 나서 악수하기를 꺼리는 핸섬하고 스마트한 40대 중반 독신 로버트의 형은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놈’이다. 누이 셋은 왕년에 잘 나가던 시스터 보컬 그룹. 주야장천 형제자매 이야기만 하는 로버트.
 
로버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필, feel’이 잡히지 않는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에 있어서 삶은 끊임없는 ‘가십, gossip’의 연속일 뿐 저 자신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로버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주체(主體)의 부재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지배하는 주어(主語)의 부재와 비슷한 데가 있다. 자아(自我)의 부재 현상.
 
단군의 후손들 핏속에 흐르는 피해의식, 남의 시샘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불안감 때문에 문장에 주어가 없는 우리의 말 습관을 생각한다. 주어 없이 “사랑해!” 하면 자연스럽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하면 서툰 외국어 번역 같아서 무드 잡친다.
 
로버트의 무아(無我) 상태는 당신과 나의 디펜스 메커니즘인 무주어(無主語) 수법과 많이 다르다. 로버트가 처세술 결핍증에 시달린다면 우리는 처세술의 달인이다.
 
어린 시절 바람떡을 처음 먹던 기억이 난다. 반달 모양의 떡 ‘껍데기, skin’를 손으로 누르면 바람이 쉭~ 새던 바람떡. 사전은 바람떡을 ‘개피떡’의 지방어라 풀이한다. 개피떡의 어원은 갑피병(甲皮餠, 갑옷 갑, 가죽 피, 떡 병) 즉, 갑옷 같은 겉껍질의 떡이라는 한자어. 당신은 개피떡, 하면 뭐? 하겠지만, 바람떡이라는 순수 우리말은 귀에 쏙 들어올 것이야.
 
만두나 송편 속에 넣는 재료를 ‘소’라 한다. ‘오이소박이’ 할 때 그 ‘소’. 순수 우리말 ‘속’에서 유래한 말이다. 밴댕이 ‘소갈딱지’의 ‘소’. 정신치료사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의 속마음, 할 때 바로 그 속!
 
우리의 성숙과정에서 가장 큰 관문은 자신의 마음이 결코 100% 고결하지 않을뿐더러 100% 저열하지도 않다는 성찰을 얻는 데 있다. 우리 마음이 청결과 불결의 종합체라는 것. 갑자기 로버트가 바람떡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는 달콤한 ‘앙꼬’일 수 있다는 상상 또한 잇달아 하면서.
 
정철(1536~1594)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1588) “扁鵲(편쟉)이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타시로다.”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 내 병은 님의 탓이다.]
 
그는 당시 정계에서 쫓겨난 자기 처지를 남 탓으로 돌리면서, 자기 탓은 1도 없다는 100% 어린애 같은 주장을 펼친다. 이별 당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유려한 비유법으로 응석을 부리면서 자기의 고초(苦楚)를 임금님, 선조 탓이라 밀어붙인다.
 
정철의 ‘소’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수법이 통할지도 몰라. 그러나 막상 그의 소를 파고들면 주벽이 심한 결점투성이의 한 미숙한 인간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4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작금의 한국에도 그런 정치인들이 부지기수라고 소리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남을 탓하는 가장 극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1905~1980)다. “Hell is other people, 지옥은 남이다.” 그의 희곡, ‘No exit, 출구 없는 방’에 나오는 명언이다. (1944) - 로버트에게 그랬듯이 나는 사르트르에게 묻는다. 사르트르야, 남들이 지옥이라면, 너 자신은 무엇이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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