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잃어버린 워커
얼마 전 50주년 한인의 날 축제가 LA한인타운에서 열렸다. 오렌지카운티에 사는 나로서는 LA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기가 참 힘들다. 나이 탓에 장거리 프리웨이 운전은 삼가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번 행사에는 나의 서화 작품도 전시된다고 해서 꼭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행사장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멀리 사는 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시화전이 열리는 LA에 가야 하는데 라이드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기꺼이 오겠다고 했다. 딸은 먼 새크라멘토에서 단숨에 달려왔다. 어찌나 고마운지 마음이 울컥했다. 본인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엄마를 위해 희생하는 딸이 몹시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토요일 일찍 일어나서 오렌지카운티에서 LA로 달려갔지만 주차할 장소가 없었다. 행사장 근처를 빙빙 돌아보아도 주차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먼 곳에 주차했다. 걸어서 멀리 있는 행사장까지 갈 일이 태산 같았다.
지난 7월 집에서 넘어져 무릎과 허리를 많이 다쳐 입원한 적이 있었다. 퇴원 후 두 달 동안 열심히 치료받아 겨우 걸어 다니고 있었다. ‘혹시’ 하고 워커를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 가지고 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몰랐다. 워커에 의지해 먼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먼저 전시장에 들러 시화전 관람을 하고 딸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미술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행사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걸어 다니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워커를 끌고 다니려니 진땀을 뺐다. 한국에서 들여온 신선한 농산물을 사고 싶어 부스마다 기웃거려 보았지만 너무 붐벼 상품을 사기도 힘들었다. 더욱이 워커를 끌고 다녀야 하니 이중삼중으로 고역이었다. 부스마다 각양각색의 한국 상품이 진열되어 모두 구경하고 싶었지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다행히 딸이 옆에서 많이 도와줘 부스를 헤집고 들어가 상품을 살 수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름 바르지 않고 살짝 구운 햇김이 정말 맛이 좋아 한 팩을 샀다. 완도 다시마, 완도 미역, 표고버섯 말린 것 등 다양하게 사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다행히 워커 손잡이에다 플라스틱 백을 주렁주렁 매달 수 있어서 좋았다. 힘들게 워커를 끌면서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다니는 내 몰골이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였으리라 생각하며 혼자 미소 지었다.
화장품 부스에 갔더니 마음에 드는 세안 비누가 있어 구매했다. 비누를 워커 플라스틱 봉지에 넣으려고 옆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앗 어찌 된 일인가! 나의 워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노래져 내 워커가 없어졌다고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라고 고함을 지르며 뒤뚱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아도 내 워커를 찾을 수가 없었다. 워커 주머니에 둔 지갑에는 현금과 함께 크래딧카드, 운전면허 등 들어 있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청천에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순간 딸을 찾아 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체면 불고하고 큰 소리로 딸 이름을 부르며 찾았는데 바로 옆 부스에서 딸이 내 워커를 갖고 상품을 사고 있는 것이 앉는가! 나는 그동안 지옥을 헤매고 다녔는데 딸은 태연하게 상품을 사고 있지 않은가! 그때 느꼈던 안도의 한숨! 겪어 본 사람은 내 심정을 이해하리라. 찰나에 일어났던 어처구니없는 나의 쇼!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워커도 없이 허둥대며 이리저리 찾아 헤매는 모습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내 몰골을 생각하며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집에 돌아와 구매한 물건을 딸과 나눴다. 행사장에서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연기를 했던 무명의 노여배우의 웃지 못할 연기에 한바탕 소리 내 같이 웃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웃기세요. 놀란 토끼처럼 허둥대며 워커를 찾아 헤매던 모습을 보았더라면 포복절도를 할 뻔했어요. 엄마는 나이가 드시니 점점 어린애가 되어가시네요. 이젠 제발 그만 웃기세요.” 그 당시 놀라 기겁을 한 내 심정은 헤아리지 못하는 딸에게 섭섭함도 잠시, 둘이서 얼굴을 마주 보며 한바탕 웃었다.
바로 옆 부스에 내 워커를 가진 딸도 보지 못한 채 사람으로 붐비는 그 좁은 골목을 절름거리며 놀란 토끼처럼 워커를 찾아 헤매던 모습 정말 우스꽝스럽다고 딸과 웃고 또 웃었다. 모든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엔돌핀이 팡팡 쏟아졌다.
워커를 찾아 들고 행사장을 다시 돌아다니는 데 한국전쟁 직후 시골에서 열리던 장날이 생각났다. 3일마다 열리는 삼일장, 5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장날 손 붙잡고 다니던 생각이 떠올랐다. 특히 나는 엿을 좋아해 엿을 사 먹고 오던 추억이 삼삼히 떠오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다.
어머니는 장날이면 안동 간고등어를 한 두루미 사다 처마 밑에 걸어두고 아버지 밥상에 올렸다. 전쟁 직후라 소고기 먹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버지상에 올라간 간고등어가 왜 그렇게 먹고 싶던지 침을 꿀꺽 삼키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내게 고등어를 주셨다. 어찌나 맛이 었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버지 사랑에 목이 멘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그 어려움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이 무척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번 축제를 준비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김수영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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