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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시니어 스토리] "오를 산이 있어서 항상 행복했네"

한인 등산계의 대부 올드타이머 김평식
에버그린클럽 한때 등록만 500명
소송 끝났지만 1년만에 흐지부지
“많은 땅 잃었지만 아쉽지도 않아”

최근 김평식 회장의 4형제가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2번째가 김회장. [김평식 회장 제공]

최근 김평식 회장의 4형제가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2번째가 김회장. [김평식 회장 제공]

50년이 넘는 한인타운 역사에는 다양한 업종과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있다. 비단 경제계나 정치계  인사들만 그런 게 아니다. 특히 취미나 여가 선용 분야에서 김평식(1940년생) 에버그린 클럽 초대 회장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아마도 전무후무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팬데믹 이전만 해도 남가주 한인사회에는 거의 20여개의 등산 클럽이 있었다. 한국에서 산마다 등산하는 인구가 넘쳤 듯이 남가주에도 등산 인구는 많았다. 다만 한국의 산과 달라서 어디를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누구를 믿고 가야 할 지 알 수 없었기에 한인들이 주축이 된 등산 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등산클럽의 고조선 같은 역할을 에버그린 클럽이 맡았다. '클럽주' 김 회장이 산을 좋아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다. 결국 한인들의 등산 문화를 세운 셈이다. 토요클럽, 일요클럽, 화요클럽이 구성돼 50인승 버스가 1주에 3번씩 출발했다. 매주 150명이 산을 찾았는데 얼마 안되는 것 같지만 선발 인원만 그런 것이지 실제 등록 회원은 500명이 훨씬 넘었다. 그래서 15인승 밴이 항상 필요할 만큼 차고 넘쳤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소송이 '잘 되던 비영리단체 등산클럽'의 발목을 잡았다. 결과는 좋게 끝났지만 상처는 컸다. 더 이상 행복하기가 어려웠던 김 회장이 물러나고 구심점을 잃은 클럽은 자연스럽게 1년만에 소유하고 있던 버스와 밴을 팔았고 수 년간 은행에 모아뒀던 회비도 조용히 사라졌다. '에버그린 클럽' 이후 여러 등산 클럽이 세워졌지만 대개 수 십명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바이칼호부터 한반도까지 펼쳐졌던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반도의 삼한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김 회장은 현재 에버그린 클럽 때와는 다른 등산과 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회원들이 모두 움직일 수 있는 목적지일 필요가 없으므로 소규모로 '반갑다 친구야'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한번 출발은 13명 정도로, 매주 3번 출발도 아니고 부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김 회장'이 가고 싶은 곳을 간다. 에버그린클럽이 결국 사람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자연은 특히 산은 항상 믿을 수 있기에 마음껏 찾는다. 최근엔 충청노인회 회원 60명과 가까운 샌타바버러를 인솔해 다녀오기도 했다.  
 
등산 전문가로 '미국 50개 주 최고봉'을 방문하고 책까지 낸 바 있는 김 회장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을까. 우선 대륙 횡단이다. LA에서 출발해 플로리다 키웨스트를 찾았다. 25일 코스로 미국 자연을 한껏 즐겼다. 종단도  LA를 출발해 시애틀을 15일만에 갔다 왔다. 보스턴으로 날아가 메인주 대서양에서 랍스터를 즐겼다. 조지아주로 가서 테네시 멤피스를 거쳐 블루리지 파크웨이를 돌아봤다. LA에서 회원들과 버스로 갈 수 없었던 곳이다. 멤피스에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는 돼지갈비도 맛봤다.
 
그의 일상은 여느 팔순 시니어와 다르지 않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오전 7시쯤 운동을 한다. 에코파크 주위를 2바퀴 돈다. 유튜브에서 여행과 음악 동영상을 열심히 본다.  
 
김 회장은 건설업, 제너럴 컨스트럭션(종합건설업)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에서 나오는 비소를 취급할 수 있는 라이선스까지 갖고 있었다. 20년간 많은 돈을 벌었고 부동산 투자도 많이 했다.  
 
'여행의 달인' 김평식 회장도 여행에 관한 버켓 리스트가 있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를 방문하면서 나중에 꼭 다시 와야지 했던 곳을 혼자 가볼 생각이다. 60년 넘게 지하 탄광이 불타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의 '센트레일리아'도 다시 가볼 계획이다.
 
최근 아들이 큰 금융회사의 사장에서 회장이 됐다. 딸도 변호사로 크게 성공했다. 자녀들에 대한 큰 바람은 없고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기억에 남는, 고마웠던 순간은 바로 에버그린 클럽 버스를 살 때다. 매번 대여를 하느니 버스를 사는게 낫다고 해서 30만달러에 달하는 새 버스 비용을 내부에서 모았다. 6명이 5만달러를 내면 2년 후 원금을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정말 6명이 돈을 모아왔다. 김 회장을 믿고 여행에 진심이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막상 30만불을 받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며 "각 5000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고 중고버스를 샀다"고 말했다. 지나고 보니 자신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실감이 난다며 눈물을 흘렸다.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 바로 부동산 폭락 전, 1990년대 초반 가졌던 부동산이다.
 
"중앙일보 건물 옆 7가일대 땅이 모두 내 소유였죠. 그런데 내 재물이 아니라는 걸 내 손에서 떠나고 난 뒤에 알았고, 이제는 아깝거나 아쉽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그동안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냥 나를 지나간 것이지."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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