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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그림 공부

고동운 전 가주 공무원

고동운 전 가주 공무원

40년 만에 대학(LAVC) 캠퍼스로 돌아갔다. 팬데믹 동안 온라인 강의를 들었는데, 가을 학기부터는 거의 모든 미술 클래스가 오프라인으로 바뀌었다. 내가 듣는 과목은 ‘수채화 I’이다.  
 
첫날 수업에 들어가니, 작년에 온라인 수업을 가르쳤던 교수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학생들의 연령대는 2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 대충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서, (2) 교양과목 학점이 필요해서, (3)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수업을 듣는 이들은 대개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처럼 정식으로 등록해서 과제물도 제출하고 시험도 보아 학점을 이수하려는 사람과 그냥 수업에 들어와 성적 스트레스 없이 그림만 배우려는 사람으로 나뉜다.  
 
늦은 나이에 미술 공부를 하게 된 것은 10대에 접었던 그림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10대 중반 무렵의 일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외가에 있는 나를 찾아와 시계 고치는 기술과 미술 중 하나를 배워 보라고 했다. 장애인 아들의 커리어를 걱정한 아버지의 배려였던 셈이다.
 


내가 정말 배우고 싶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눈치를 보니 아버지는 내가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으면 하는 것 같았고, 어디선가 들었던 “그림쟁이는 배고프다”는 말도 떠올랐다.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워 보겠노라고 답했다. 그 후 나는 두고두고 그 결정을 후회했다.  
 
길 건너에 있던 시계방 주인에게서 시계 수리를 배웠다. 도무지 모르겠고 재미도 없어 기술을 익히지 못했다. 그 무렵 이런 공부는 가게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매일 어깨너머로 보고 들으며 배우는 것이었다. 나처럼 일주일에 3-4시간 설명을 듣고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된 후에도 그림 공부를 할 여유는 없었다. 영어를 배워야 했고, 먹고살고, 아이들 키우기 위해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그림 공부는 버킷 리스트에 담아 두었다.  
 
어느새 버킷 리스트를 꺼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꿈은 이루지도 못하고 가게 생겼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미술 공부다.  
 
수채화나 유화를 듣기 위해서는 기초적으로 들어야 하는 미술 클래스들이 있어 팬데믹 기간에 온라인으로 이수를 했다. 수채화를 할 것인가 유화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는데, 이미 두 과목을 모두 들었던 아내가 수채화를 권했다. 화폭의 크기나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수채화가 수월할 것이라고 했다.  
 
수채화는 물과의 싸움이다. 물을 잘 써야 좋은 색과 질감이 나온다. 덧칠해서 수정이 가능한 유화와 달리, 붓이 지나간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새로 물감을 칠하면 덧칠한 것이 그대로 보인다. 붓질을 너무 많이 하면 말랐던 안료가 떨어져 나와 떡칠한 표가 난다.  
 
수채화를 배우며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채화는 한 번 쓱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다. 물 자국이 남으면 남은 대로, 선이 고르지 않으면 고르지 않은 대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던가. 지난 것을 바꾸어 보겠노라고 다시 들추고 되새기다 보면 상처가 드러나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수채화 같은 가을 하늘이 아름다운 아침이다. 당신이 잊고 있는 꿈은 무엇인가요.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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